스크린을 압도하는 '생존'이라는 미장센(Mise-en-scène)
오늘 저녁엔 뭘 볼까. 스마트폰을 들고 넷플릭스와 티빙, 웨이브를 순례하는 여정은 이제 현대인의 익숙한 일과가 되었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썸네일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취향과 안목으로 '오늘의 선택'을 감행한다. 그런데 혹시, 당신의 손가락이 유독 한 카테고리 앞에서만 무심하게 빨라지진 않는가. 바로 '애니메이션' 탭이다.
"애니는 좀…." 이 한마디에 담긴 복합적인 감정을 우리는 안다. 어딘가 유치할 것 같고,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에 몰입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선입견. 과장된 리액션과 알 수 없는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그들만의 세상일 것이라는 막연한 거리감. 이해한다. 당신의 시간은 소중하고, 검증된 재미를 보장하는 영화와 드라마만 챙겨 보기에도 바쁘다.
하지만 만약, 그런 당신의 편견을 기분 좋게 배반할 작품이 있다면 어떨까.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빌렸을 뿐, 그 속살은 한 편의 묵직한 역사 영화이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바이벌 스릴러에 가까운 이야기가 있다면 말이다. 여기, 당신의 '인생 작품' 리스트에 슬며시 끼어들 준비를 마친 애니메이션 한 편을 소개한다. 바로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이다.
좋은 영화를 고를 때 우리는 종종 감독의 이름을 확인한다. 봉준호, 박찬욱, 크리스토퍼 놀란. 그들의 이름은 곧 '웰메이드'를 보증하는 하나의 인장이다. 이 작품의 원작자, 마츠이 유세이 역시 그런 존재다.
그의 이름을 몰라도 <암살교실>이라는 작품은 들어봤을 것이다. '내년 3월에 지구를 파괴할 괴물 선생을, 그 제자들이 암살해야 한다'는 황당무계한 설정. 처음엔 그저 기발한 개그 만화로 보였던 이 이야기는, 회를 거듭하며 '암살'이라는 행위를 통해 '진정한 교육과 성장'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깊이 있는 드라마로 진화했다. 독특한 설정 속에서 입체적인 캐릭터들을 빚어내고, 독자의 허를 찌르는 감동과 교훈을 선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츠이 유세이의 장기다.
그런 그가 <암살교실> 이후 선택한 무대는 놀랍게도 '역사'의 한복판이다.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은 14세기 일본,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격변기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호죠 토키유키'는 가문의 몰락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실존 인물이다. 작가는 역사라는 단단한 땅 위에 자신의 특기인 '캐릭터 조형술'과 '예측불허의 서사'를 펼쳐 보인다.
이는 마치 영화 <광해>나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적 사실(Fact)이라는 뼈대에 작가적 상상력(Fiction)이라는 매력적인 살을 붙이는 작업과 같다. 덕분에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흥망성쇠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한 인간의 '서사시'를 마주하게 된다. 검증된 이야기꾼이 작정하고 빚어낸 역사 드라마. 이 하나만으로도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영웅 서사는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물리치거나, 역경 속에서 각성하여 더 강한 힘을 손에 넣는다. 하지만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의 주인공, 호죠 토키유키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그는 칼을 쥐는 법도, 군대를 지휘하는 법도 모른다. 그의 유일하고도 압도적인 재능은 바로 '도망치는 것'이다.
가문이 멸망하던 그날, 충신들은 어린 도련님에게 외친다. "싸우지 마십시오! 살아남으십시오!" 이 작품에서 '도망'은 비겁함이나 나약함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가장 절실한 투쟁이자, 다음을 기약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다. 적의 칼날을 피하고, 추격자의 허를 찌르며,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경로로 사라지는 토키유키의 모습은 무력한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무기로 세상을 상대하는 생존 전문가의 그것에 가깝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은 놀랍도록 현실적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묘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무작정 부딪히는 것만이 정답일까? 때로는 한발 물러서 상황을 관망하고, 때로는 완전히 몸을 숨겨 위기를やり過ごし, 기회가 올 때까지 버티는 지혜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를 두고 '존버'라고 부른다. 토키유키는 말 그대로 '존버'의 화신이다. 그의 생존기는 '힘 센 영웅'에 대한 대리만족이 아닌, '어떻게든 살아남는 인간'에 대한 처절한 공감과 응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만 치면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의 진정한 쾌감이 폭발한다. 이 작품의 액션은 '어떻게 상대를 쓰러뜨리는가'가 아닌, '어떻게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가'에 맞춰져 있다.
토키유키의 '도망'은 그냥 달리는 게 아니다.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적의 심리를 역이용하며, 동료들의 각기 다른 능력을 조합해 탈출로를 만들어낸다. 그 과정은 마치 정교하게 짜인 한 편의 케이퍼 무비(Caper Movie)를 보는 듯하다. 정보를 교란하는 괴짜 신관,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충신 등 개성 넘치는 동료들과 함께 '탈출'이라는 미션을 수행하는 모습은 영화 <오션스 일레븐>의 팀플레이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지를 발휘하는 장면은 <미션 임파서블>의 긴장감을 연상시킨다.
이 지적인 쾌감은 고품질의 영상 언어를 통해 극대화된다. 제작사 'CloverWorks'는 <스파이 패밀리>, <봇치 더 록!> 등 최근 가장 주목받는 작품들을 연달아 히트시킨 실력파 집단이다. 그들의 손에서 탄생한 역동적인 화면 구성과 유려한 작화는 토키유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단순한 칼싸움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전략적 후퇴'의 묘미. 이것은 분명 액션 영화 팬들의 심장도 뛰게 할 새로운 종류의 카타르시스다.
우리는 때로 익숙함의 울타리에 갇혀 새로운 세상과 만날 기회를 놓치곤 한다.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익숙지 않은 형식 너머에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을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훌륭한 사례다.
이 작품은 검증된 이야기꾼이 빚어낸 묵직한 역사 서사이며,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호소하는 현실적인 영웅담이고, 두뇌 싸움의 쾌감이 살아있는 웰메이드 스릴러다.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잠시만 내려놓고 이번 주말, 딱 1화만 시간을 내어보길 권한다. 당신이 웰메이드 영화 한 편을 고르는 신중함으로 이 작품을 마주한다면, 분명 그 가치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호죠 토키유키의 위태로운 여정은, 당신이 애니메이션이라는 광활한 세계로 떠나는 즐거운 '도망'의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 당신의 '인생 작품' 목록에 애니메이션 한 편이 추가되는, 그 신선한 경험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