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엑스에서 열린 커피 엑스포에 다녀왔어요. 제가 참가한 건 아니지만, 업계 동향을 확인할 겸 지인들도 만나고 왔죠.
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통해 생일 파티를 거하게(?) 치른 것도 확인했어요.
생일 전날에 주짓수 시합이 있었어요. 시합을 마치고 관원들과 뒤풀이 겸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날짜가 바뀌어서 케이크에 초도 불었죠(웃음).
주짓수를 수련한 지는 얼마나 됐나요?
햇수로는 5년인데 중간에 2년 정도 공백이 있었어요.
공백인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리커버리커피바>가 자리 잡기 전까지는 다른 데 신경 쓸 수 없었어요. 안정 궤도에 들어섰다고 생각한 이후로는 거의 매일같이 도장에 출석하고 있죠(웃음).
<리커버리커피바>에서 본인의 역할을 더 자세하게 말해주세요.
직원 관리와 매장 운영을 맡고 있죠. 로스팅한 원두를 거래처에 납품하기도 하고 커피 관련 교육을 하기도 해요. 직원들이 많이 도와줘서 외부 일정을 소화할 수 있죠. 저의 업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리커버리커피바>의 장점을 외부에 보여주는 일을 한다고 보면 되겠네요.
커피 관련 교육은 뭔가요?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노하우를 전수하는 건가요?
얘기하신 것처럼 초기에는 커피 맛에 집중한 기술적인 부분만 교육했어요. 추출 잘하는 법, 라테 아트 잘하는 법처럼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커피만 잘하는 게 좋은 바리스타가 아니구나.’라는 걸 깨닫았죠. 그 뒤로 운영과 재정까지 시야가 넓어졌어요.
커피 초심자, 주니어 바리스타, 시니어 바리스타 그리고 카페 사장님으로 단계를 나누어 교육하고 있어요. 제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바리스타의 역할과 책임, 매장 운영 방법을 알려주고 있죠. 찾고 싶은, 기억하고 싶은 카페가 많아지려면 그만큼 건강한 직업의식을 가진 바리스타가 많아져야 하거든요.
13년째 커피 업계에 종사하고 있잖아요. 처음 커피에 빠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원두커피를 마셨어요. 사실 그때는 정말 별로였어요. 이 쓴 걸 왜 돈 주고 마시는지 이유를 몰랐죠. 그런 제가 대학에서 커피를 전공했답니다(웃음).
당시에는 제가 대학에서 커피를 전공할 줄은 상상조차 못 했어요. 광고나 매체 쪽에서 일을 하고 싶어서 사진을 전공하려 했거든요. 사진학과가 있는 대학교 리스트를 확인하다가 ‘커피 바리스타 전공’을 발견했어요. ‘커피 전공이 있어?’라는 생각과 동시에 가슴이 뛰었어요. 커피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터였거든요. 커피를 만드는 제 모습을 상상하니 즐겁기도 했고요.
이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처음에는 반대하셨어요. 이후 진지하게 몇 번 더 말씀드렸더니 ‘정 하고 싶으면 상원이 너 하고 싶은 거 해라.’라고 하시면서 저를 응원해 주셨죠.
부모님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현재의 <리커버리커피바>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네요. 스스로 바리스타라는 직업의 전망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요즘은 기계가 많은 일을 해요. 10년 안에 사라질 직업이라는 소리도 들리고요. 그러나 바리스타의 역할이 단순히 커피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카페를 방문하는 이유가 꼭 커피 맛 때문은 아니거든요. 손님과 소통하고 공간을 운영하는 것도 중요해요. 손님과 직원과의 관계, 가게 분위기도 카페를 찾는 큰 이유거든요.
지금보다 더 많은 프로 바리스타가 필요해요. 기계처럼 피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커피 추출 원리, 원두와 머신의 특징을 알고 손님에게 음료를 어떤 식으로 제공할지 고민하는 이들이요.
본인의 의도를 커피와 서비스에 녹여낼 수 있어야 하겠네요.
그렇죠. 하지만 결과물은 심플하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해요.
말한 것처럼 손님과 바리스타의 관계가 카페에 미치는 영향이 크잖아요. 상원님은 어떤 식으로 손님과 교류하고 있나요?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가게를 지나가는 손님에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요. 한 손님은 다른 카페에서 손님과 손님으로 만났어요. 이후 저희 매장을 찾아오면서 친해지게 됐죠.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부탁을 하기도 해요. 최근에 저희 집 가구 배치를 바꿀 때 도와주기도 했어요(웃음).
그 정도면 진짜 친구네요.
방문하는 모든 분이 편한 마음으로,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라고 생각하고 방문하면 좋겠어요. 사장님, 대표님이라 불리는 것도 싫지는 않지만 상원 씨, 형. 이렇게 불러주면 더 좋겠고요.
저도 지금부터 상원 씨라고 부를게요(웃음). 손님과 함께 한 특별한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네요.
<리커버리커피바>를 운영하기 전, 성신여대 근처에서 <저스트커피로스터스>를 운영할 때 한국인 둘, 외국인 둘이서 부산 여행을 떠나기도 했어요. 2박 3일 간 영어로 대화하다 보니 여기가 부산인지 파주 영어 마을인지 헷갈리더라고요(웃음).
호주에도 다녀왔잖아요.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잠시 다녀왔어요. 성신여대 앞 작은 골목, 매장 안에 갇혀 있는 게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제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였는데 매너리즘에 빠진 거죠.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썩고 있었어요. 가게를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카페 운영 문제로 워킹홀리데이라는 길을 택한 건 아니었나 봐요.
결국에는 운영까지 힘들어졌어요. 제가 에너지를 내뿜지 못했으니까요. 게다가 같은 상권, 가까운 카페에서 제 메뉴를 도용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손님들은 누가 원조인지에는 관심도 없더라고요. ‘누구 하나 이 사건을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내가 이 일을 열심히 할 이유도 없겠구나.’까지 이어졌어요. 이런 상황이 겹치면서 카페를 정리하게 됐죠.
카페를 정리한 뒤에는 1년 정도 프리랜서 활동을 했어요. 게스트 바리스타 근무하거나 로스팅한 원두를 납품하며 호주에 갈 준비를 했어요.
호주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요?
멜버른에 있는 Manchester Press에서 바리스타로 근무했어요. 손님과 좋은 유대를 형성하며 스페셜티 커피를 제공하던 곳이에요. 일하기 시작한 지 삼일 째 되던 날 매장 마감도 저에게 맡기더라고요(웃음).
호주에서 바리스타로 근무하면서 겪은 에피소드 하나만 소개해주세요.
커피를 테이크 아웃한 손님이 다시 매장으로 들어서면서 ‘이 커피 누가 만들었어?’라고 묻더라고요. 컴플레인이라고 생각해서 긴장하면서 제가 만들었다고 답했죠. 그런데 걱정과는 반대로 ‘고마워. 덕분에 아주 행복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겠다.’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어요. 내가 만든 커피가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 순간이었어요.
10년 넘게 바리스타로 근무하면서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를 잊고 있었거든요. 일에 대한 확신이 다시 생겼어요. 얼마나 이 일을 사랑하는 지도요.
도피처나 다름없던 호주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거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찾기 위해 호주로 떠난 것 같아요.
그 손님에게 다시 커피를 서비스했나요?
이후에 바로 코로나로 인해 호주 전체가 셧다운에 들어가면서 다시 만나지 못했어요. 모든 음식점은 테이크 아웃만 서비스해야 했고 목적 없이 외출할 수도 없었거든요. 저희 매장도 헤드 바리스타와 헤드 셰프만 출근했고, 나머지는 언제 다시 출근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 됐어요.
당시에는 전 세계적으로 분위기가 심각했잖아요. 어머니가 ‘죽더라도 한국에 와서 죽어라.’라고 하시며 귀국을 강요하셨어요(웃음). 그렇게 호주로 떠난 지 두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리커버리커피바>를 열게 된 건가요?
그때는 더 이상 카페 운영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다시 매장에 갇히기 싫었고 책임감도 더 크게 다가왔거든요. 게다가 호주 맛(?)을 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호주로 돌아갈 지만 생각하고 있었죠. 다시 오겠다는 마음으로 멜버른에 캐리어도 맡기고 왔으니까요. 호주에서 일렉 기타를 하나 구매했는데 캐리어 대신 기타를 들고 한국으로 왔어요.
비싼 기타였나 봐요. 아직 갖고 있나요?
집에 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살 걸 그랬나 봐요(웃음). 당시에는 정말 호주로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전처럼 프리랜서 활동을 이어갔어요. 매장 컨설팅도 하고 커피 교육도 하면서요. 그런데 수입이 안정적이지 못하니 심적으로 힘들더라고요. 그때 부모님이 ‘다시 카페를 운영하는 게 어떻겠니?’라고 먼저 제안을 주셨어요.
그렇게 다시 카페 운영을 위해 자리를 알아보던 중 현재 <리커버리커피바>가 있는 성수동에 오게 됐어요. 사진으로 봤을 때는 정말 별로였는데 실제로 보니 괜찮더라고요. 생각보다 유동인구가 많고 채광도 좋고 큰 건물도 주변에 있고요. 다른 매물을 보지 않고 바로 계약을 했어요. 그때가 2020년 8월이에요.
<리커버리커피바>는 무슨 의미인가요?
영국 드라마 ‘닥터후’에서 주인공이 힘을 다 하면 죽고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요. 부럽더라고요. 당시 저에게 필요한 모습이기도 했고요. 지친 모습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고 싶었거든요. 이곳을 찾는 이들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의미도 있어요.
현재는 저희 원두 블렌딩에 사용 중이지만, 가게 명 후보 중 ‘블랙 웨이브’도 있었어요. 학창 시절 사진에서 커피로 마음이 쏠렸을 때 검은 파도가 저를 집어삼키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리커버리커피바> 로고를 파도 모양으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죠.
사람들은 파도를 어려움, 고난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파도가 친 후에 생태계가 회복되고 결국 물이 맑아진다고 생각해요. 당장의 어려움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극복한 후에 더 강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리커버리커피바>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좋은 문화를 선보이고 싶어요. 우리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들로요. 매장에서 편지지도 판매 중인데요.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할 때 편지로 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좋은 마음을 전하는 일이 회복의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최근 빠르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많잖아요. 이와 반대로 본질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어요. 10년 전에도 잘 팔렸고 10년 후에도 잘 팔릴 것들을 하고 싶거든요. 트렌드를 쫓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은 것으로요. 휘발되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래 남아 회복에 도움이 되는 공간, 친구가 되고 싶어요.
아픈 손가락. <리커버리커피바> 2호점의 실패 원인을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먼저 오픈한 이유부터 설명드릴게요. 제 친형도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당시에는 친형과 로스팅 머신을 공유했어요. 각자 스타일의 차이도 있었고 서로 납풍량이 늘었어요. 점차 독립에 대한 갈망과 매장 확장에 대한 욕심으로, 독자적인 로스팅을 위한 2호점을 2022년에 오픈하게 됐죠.
2호점을 함께 운영하다 보니 제가 매장에 신경 쓸 시간이 많아지면서 다시 매장에 묶이게 됐어요. 외부에서 일을 끌어오고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아직은 욕심이구나.’라는 생각에 1년 만에 정리하게 됐죠. 덕분에(?) 현재는 이렇게 로스터리도 한 공간에서 운영하고 있고요.
상원 씨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옮겨보려고 하는데요. 혹시 MBTI 알고 계세요?
ENFP예요. INFP도 간혹 나와요.
본인 성격이 <리커버리커피바> 운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말을 잘 거는 편이거든요. 학창 시절 취미로 마술을 하면서 말을 거는 법과 말에 집중하게 하는 법을 배웠는데, 이게 매장 운영에 도움이 되더라고요. 저랑 한 번 대화를 한 후에 다시 방문하는 경우가 많아요.
매장에서 마술을 선보일 때도 있겠네요.
가끔 요청하는 손님이 계시긴 하지만 대부분은 제가 마술을 했다는 걸 몰라요. 사진도 마찬가지고요. 나중에 이벤트로 해도 재밌을 것 같네요(웃음).
<리커버리커피바>는 일요일이 휴무잖아요. 이때는 뭘 하세요?
교회도 가고 지인들과 카페 투어를 하기도 해요. 다른 매장은 어떻게 손님을 대하고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등을 보면서 공부도 하면서요. 그리고 쉬는 날에는 무조건 ‘남.타.커’를 마셔요. 남이 타준 커피요(웃음).
보통 오토바이로 출퇴근하죠? 처음에 어떻게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는지가 궁금하네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스쿠터 뒤에 종종 타곤 했어요. 그래서 오토바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어요. 제 소유의 첫 오토바이는 2019년식 혼다 슈퍼커브예요. 커브를 타기 시작하면서 40분 넘게 걸리던 출퇴근 길이 10분으로 단축됐어요.
첫 오토바이를 갖게 됐을 때의 감동이 기억나나요?
처음에는 감동보다는 그냥 무서웠어요. 3일 정도는 10km 이상 거리는 운행하지 않았거든요. 한강 다리 건너는 것도 무섭더라고요. 점차 오토바이 운전에 적응하면서 자유함을 느끼게 됐어요. 속도에 대한 열망은 없어요. 보기보다(?) 겁이 많은 편이거든요(웃음).
오토바이 하면 연상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잖아요. 위험, 과속, 불량. 이런 편견 없이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네요.
오토바이 타는 이들을 둘로 나눠뒀어요. 아버지처럼 상업적으로 또는 일상에서 타는 사람.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며 일탈을 하는 불량한 사람으로요. ‘나는 어디에 속할 것인가?’라는 생각도 했었죠.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멋지게 타는 이들을 알게 됐어요. 정확히는 그들의 멋을 알게 된 거죠. 저도 그 부류에 속하고 싶어졌어요.
오토바이를 멋지게 타는 이들, 그들의 멋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세요.
기종이나 배기량과 상관없이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갖고 충실하게 삶을 사는 이들이요. 이런 삶의 태도로, 각자 개성에 맞는 오토바이를 타는 이들이 멋진 라이더라고 생각해요.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싶은 인물도 있나요?
홍철이 형이요. <리커버리커피바> 2호점을 닫으면서 심적 부담감이 심했어요. 그때 ‘내 상황이 이렇게 힘든데 홍철이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끌어올렸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분의 마인드 셋이 너무 궁금해요. 그래서 꼭 한 번 오토바이를 같이 타고 대화도 나누고 싶어요. 얼마 전에 저희 가게에 오는 꿈도 꿨어요.
상원 씨에게 오토바이란 무엇인가요?
좋은 이동 수단이자 감정을 극대화하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좋은 감정이던 나쁜 감정이던지요. 그래서 기분 안 좋은 날에는 오토바이를 절대 타지 않아요. 저도 모르게 험하게 타게 되거든요. 반대로 기분이 좋을 때는 시트 위에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요
오토바이로 즐겨 찾는 곳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팔당댐을 지나 양평으로 갈 때 풍경이 확 달라져요. 그 길이 좋더라고요. 특히 서울에서만 오토바이를 타신다면, 양평에 꼭 한 번 나가보세요. 시외로 한 번 나간다면 서울이 얼마나 답답한 곳인지 알게 될 거예요.
현재는 다른 오토바이를 타고 있잖아요. 어떤 오토바이인지 소개해 주시겠어요?
2021년식 로얄엔필드 인터셉터 650과 1997년식 혼다 스티드 600이에요. cc로만 보면 비슷한데 둘이 전혀 다른 스타일이에요.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인터셉터 650은 출력도 넉넉하고 진동이 적어서 타기도 편해요.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정말 괜찮은 오토바이예요. 게다가 가성비도 좋죠. 스티드 600은 쵸퍼 스타일로 커스텀 된 상태라 차체가 낮아요. 발 착지성이 좋아서 편하게 탈 수 있죠. 오래된 바이크가 주는 고동감을 느낄 수 있죠. 예전에 할리 타는 형들이 시속 60~80이 제일 맛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요.
1997년식 오토바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나요?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지만 어려운 편이에요. 게다가 커스텀 바이크다 보니 부품을 제작해야 하 경우가 많고요. 아직은 이것저것 손보며 컨디션을 올리는 중이에요. 지금도 누유 때문에 수리가 필요한 상태예요(웃음).
스티드처럼 오래된 오토바이 구매 여부를 고민하는 분도 있을 텐데요. 구매를 추천하나요?
세컨드 바이크로 추천해요. 시간적 여유가 있고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분이라면 더욱 좋고요. 언제 멈출지 모르니까요(웃음). 실제로 시동이 걸리지 않은 적이 있어요. ‘연료가 없어서 그런가.’ 싶어서 주유소까지 끌고 가서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배터리가 방전되더라고요(웃음).
올드카랑 똑같네요. 여기 고치면 저기가 고장 나듯이요.
맞아요. 대신 그만큼 애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오토바이를 타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 항상 안전하게 탔으면 좋겠어요.
반대로 아직 오토바이를 경험하지 못했거나 구매를 망설이는 분들에게는요?
너무 남의 말에만 귀 기울이지 않길 바라요. 인생은 자신의 것이잖아요. 생각보다 주변의 만류 때문에 못 타는 이들이 많아요. 친구, 동료, 심지어 부모님이 말린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을 펼쳐봤으면 좋겠어요. 대신 아내의 반대라면 안 되겠죠.
아직 미혼이시잖아요.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여자친구나 미래의 아내분이 오토바이를 반대한다면요?
저는 안 탈 수 있어요. 나중에 몰래 타거나 하는 게 아니라요. ‘알겠어. 오늘부터 안 탈게.’라고 하고 대신 뚜껑 열리는 차를 사지 않을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