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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기다리는 아이
by 체리 Apr 01. 2018

다섯 번째

척도의 잔인함

 파리에 와있다. 원래부터 3월의 파리 날씨는 변덕스러운 편이지만 일기예보는 온통 비 소식에 그마저도 하루에 몇 번씩 엇나가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미세먼지만 빼면 날씨는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다. 오늘은 처음으로 치료를 시작했던 날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려 한다. 남에게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털어놓는 것이 처음이고, 그전날 하루를 온종일 자살 충동과 씨름하며 보냈던 것과 '원래' 내 성격을 감안하면 말을 하다가 울컥해서 눈물 한두 방울쯤은 흘릴 법도 했는데 의사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동안 찰나의 동요조차 겪지 않았다. 꽤나 온화한 느낌의 의사 선생이었다. 핑크와 회색의 줄무늬가 들어간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게 첫 진료 날의 일인지 아니면 다른 날의 일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왜' 우울증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느냐는 그의 질문에는 달리 할 말을 찾기가 힘들었고, 나는 대충 그럴듯해 보이는, 준비된 이유들을 내보였을 뿐 내가 생각하는 진짜 이유는 발꿈치로 쓱 밀어 숨겼다. 원인이 뭐가 중요하겠냐는 생각도 컸다. 이미 병은 얻었고 괴로움은 진행형인데. 결국 한국에서 받은 마지막 진료 때까지 진짜 이유에 대해서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의사 양반한테 미안하다는 마음이 조금은 있지만 신뢰 문제와는 별개로 내가 생각하는 진짜 이유는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 여전히 그렇다. 10대 끝무렵의 나는 괴로운 일로 터져나갈 것만 같을 때 누구든 붙들고 털어놓지 않으면 못 견딜 만큼 아파했는데, 26살이 된 지금은 내 괴로움을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는 아집을 품고 살고 있다. 살아가면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지지를 표시할 때 털어놓는 경험 특선집은 팔꿈치로 툭 건드리면 술술 나올 만큼 잘 정리되어 있지만 그뿐이다. 내보이고 싶지 않고, 위로받고 싶지 않고. 그만 쉬고 싶은데 내가 쉬고 싶다고 말해도 될 만큼 뭘 많이 해놨나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뭐 엄청 큰 기대는 안 하지만 지금 이건 살아도 산다고 할 수 없으니 어떻게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딱 이 정도의 마음으로 정신과 문턱을 넘었다. 

 증상이나 짐작 가는 원인, 내가 생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가족 구성으로 살고 있는지 등의 기본적인 질문에 대답한 후에는 컴퓨터를 이용해 우울증 정도를 측정하는 다양한 질문에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내 증상이 무거운지, 가벼운지에 관해서 논하자면 중상 정도인 듯했다. 전교 학생 300명 중에서 한 100등 안팎, 뭐 그런 느낌인가 생각하니 우습게도 느껴졌다. 의사는 당신이랑 이야기 나누면서 판단한 것보다 컴퓨터 검사를 통해 나온 결과가 더 경증으로 나왔다고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내가 사회과학만 몇 년을 공부했는데, 리커트 12점 척도다 뭐다 하면서 비슷비슷한 4-5가지 질문을 섞은 설문지를 때로는 직접 만들고 때로는 다른 학생한테 붙들려 반 강제로 설문지 빈칸을 채워주기도 하고, 그렇게 5년 넘게 시달리다 보면 적당 적당히 대답하는 기술도 생기는 법이다.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그런가, 중상이란 말인가. 뭐든 정량화를 하다 보면 위와 아래가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의사가 직접 가족들에게 전화해서 절대 혼자 두지 말라고 말할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1주일 넘게 복용할 만큼의 약을 처방하기엔 약간 위험할 수 있는, 그 정도 환자 취급을 받았다. 


 그 후론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나 요새 치료받아,라고 말하고 싶어 질 때마다 '잠깐만, 나 너무 엄살 부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목소리를 앗아갔다. 증상이 심각한 상위 몇 퍼센트는 말해도 되고 그 아래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어느 정도' 심각한 우울증인지 알게 된 후로는 말하기가 좀 더 망설여졌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화 이후로 가능하면 '나는 그렇게 중증은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어도' 같은 표현은 삼가려 한다. 


 때로 글에는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스스로의 증상이 어느 정도인지 남과 비교해 가며 요새 내가 어떤 상태인지 털어놓을 때마저도 자신을 등한시했던 경험이 있는 만큼, 통증을 옭아매고 목소리를 빼앗는 풍조에 내 문장을 보태고 싶지 않다. 


아픔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아픔은 어떤 수단도, 기준도 아닌 아픔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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