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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존밀크 9시간전

옥스퍼드 이방인

난생처음 이방인으로 살아보다



 영국 옥스퍼드 카팍스 타워에 있는 한 카페에 앉아 핫초코를 한 입 마셨다. 순간 한숨이 푹 새어 나온다. 핫초코, 핱초콜릿, 핫촤컬릿 등 현란한 혀드리블로 주문을 시도했지만 직원은 나에게 세모눈을 뜨며“Sorry?”라고 말할 뿐이다. 저런 반응을 보면 내가 더 미안하다. 곧 불혹이 될 새내기 중년인데 스스로 핫초코도 못 시켜 먹는 인생이라니, 괜히 빳빳한 혓바닥 탓 한번 하고 결국은 아이폰으로 ‘Hot chocolate’을 쳐서 직원에게 보여주고 말았다. (참고로 영국에서 핫초코는 호트촠릿이라고 말해야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다.)     



 봄이 올 무렵, 남편은 다시 영국 옥스퍼드로 떠났다. 그는 떠나면서 나에게 추석 때 영국으로 여행을 올 수 있냐 물었다. 그곳에서 보낼 달콤한 며칠 때문에 한국에서의 삶을 길고 텁텁하게 살 순 없어서 그 요청은 거절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가을이 올 무렵, 나는 남편과 함께 옥스퍼드로 훌쩍 떠났다. 난 어쩌다가 이 낯선 땅에서 핫초코 따위 때문에 쩔쩔매고 있는 걸까.     



 20대 내내 못 풀었던 ‘임용 고시 최종 합격’이라는 숙제를 해결하고 나면 남은 인생은 탄탄대로일 줄만 알았다. 하지만 해당 숙제가 해결된 이후엔 더 많은 고민과 고통이 눈덩이처럼 나에게 굴러왔다. 눈덩이는 쌓이고 쌓여 빙산이 되었고 난 그 밑에 깔린 북극곰처럼 정신 차릴 수가 없었다. 이 땅에는 내가 발 딛고 서 있을 지구가 없었다. 지금 날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이 땅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다.     



 도피 끝에 정신 차려보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옥스퍼드의 한 어학원이었다. 영어로 말은 전혀 못 하지만 어찌어찌 듣고 이해하기는 가능해서 수업 시간에 깔깔거리고 웃기만 하는 푼수 아줌마 롤을 맡았다. 지난 6개월 동안 이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던가? 물론 학원에서 내주는 숙제를 보면 다시 미간이 구겨진다. 인생 숙제 해결을 한 뒤 가을에 공부할 일은 절대 없을 줄 알았건만 난 이 가을에 10대 이후에 공부해 본 적 없는 영어를 무려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 나이에 도대체 뭐 하고 있느냐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난 6개월의 삶이 내게 준 고통에 비교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행복이다.     



 어학원에서 나와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은 모두 나보다 10살 이상 어리다. 난 결코 그들만큼 영어를 잘하지 않지만, 난 그들과 함께 현재를 살며 같은 것을 공부하고 있다. 내가 저 아이들과 같은 나이였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서 새 삶을 준비했을 것이란 아쉬움이 든다. 이 땅에 본의 아니게 왔지만, 한국에서 마주할 수 없었던 여러 감정과 경험을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 이곳의 매일은 낯설지만 흥미롭다.     



 평범한 삶을 살던 때엔‘어떻게 해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란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다. 당시엔 살면서 걱정할 것이 없으니 별 걸 다 고민하고 앉아있다고 자조했다. 평범함을 흉내 내며 살고 있는 지금은 그 말에 대한 답을 전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정확히 알겠다, 인생은 전반적으로 노잼이다. 매일 똑같은 일과, 매일 만나는 색기 넘치는 얼굴들(미친 색기, 돌은 색기 등), 매일 마주하는 지겨운 과제 등. 그렇게 지겹게 살다가 어쩌다 한번 즐겁고 행복한 에피소드라도 생기면 건빵 속 별사탕처럼 그걸로 이 지루함을 버텨내는 것이다. 단 하루라도 행복한 경험을 하고 나면 덕분에 일주일은 버틸 수 있다. 근데 나는 6개월이란 시간을 호기심 어린 이방인의 행복을 누렸다. 그럼 난 얼마나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일까?     



 난 이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엔 관심이 없다. 지금의 나에겐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날 행복하게 만드는 순간들은 자주 만들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 방문하기, 날 보듬어 주는 무언가를 하기, 파란 하늘이 빨간 노을이 되는 걸 지켜보기, 날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수다 떨기 등. 이런 순간들이 뭉치고 뭉치면 이자가 복리가 되어 나의 생의 길이를 길게 늘어뜨려 줄 것이란 희망이 생긴다. 어차피 인생은 버티는 것,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방인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삶에 닥칠 사건들을 만화경처럼 바라보며 나를 반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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