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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 Sep 05. 2018

바르셀로나의 어느 아침

잠옷 바람으로 그라시아 거리에 앉아


"방이 아직 준비 안됐어요. 짐은 맡겨두고 두시간 있다 오세요."


잠옷 차림에 씻지도 않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나에게 리셉션 직원이 말했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을 꿈뻑거리며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냥 방만 바꾸는 거라면서요. 바로 바꿔주는 건 줄 알고 씻지도 않고 나왔다고요."


체크인할 당시부터 2박 후 방을 바꿔야 한다고 통보받긴 했지만 두시간이나 공백이 생긴다는 말은 못 들은 터였다. 지난 밤을 신나게 불사르고 새벽 6시께에 누운 나는 잠이 절실했다. 직원은 내 초췌한 몰골을 보더니 미안해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방에 들어갈 수 없어요. 원한다면 로비에서 자도 괜찮아요."


오랜 여행의 경험으로 여기서 말싸움을 해봤자 득이 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순순히 짐을 맡기고 거리로 나왔다. 바르셀로나의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를 따갑게 때려댔다.


적당히 나무그늘 진 벤치를 찾아 앉자 나른하게 잠이 쏟아졌다. 오른쪽에는 노숙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벤치에 푸지게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잠옷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온 내 행색이 그와 별 다를바 없었다. 나도 그처럼 드러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자리에 눕는 순간 국제 노숙자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게 뻔했다.


나는 밀려오는 잠을 쫓기위해 하릴없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두시간 동안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때울 요량이었다. 이런 몰골로 관광을 갈 수도 없거니와 지난 밤 뛰어놀은 두 다리가 욱신거려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요즘 읽고 있는 천명관의 소설 <고래>는 딱 취향에 맞아 술술 읽혀진다. 책이 워낙 재미있어 다행히도 읽는 동안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한참을 집중해서 읽다가 잠깐 담배를 피기 위해 고개를 들자 그제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요일 낮의 찬란한 여름햇살이 비추는 거리에 온갖 화려한 명품샾이 즐비했다. 그 앞을 저마다 한껏 멋을 부린 사람들이 들뜬 표정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바르셀로나 관광의 중심지, 그라시아 거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서울이나 발렌시아의 내 방에 있는 게 아니었다.


더없이 세련된 눈 앞의 켄조 매장을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책이나 읽으며 햇빛이나 쬘 것이었으면 얌전히 발렌시아에 박혀 있을 것이지, 바르셀로나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내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웠다. 물론 핑계는 있다. 나는 화장은커녕 씻지도 못하고 잠옷바람으로 거리에 나앉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여 바르셀로나에서의 1분 1초를 충실하게 즐겨야 한다는 열망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구색을 갖추고 나왔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구태한 삶의 습관을 여기까지 끌고 온 나의 천연덕스러움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그랬다. 아무리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발을 붙이고 몸을 뉘이면 그 때부터는 여행이 아닌 삶을 살았다. 어느 도시든 도착하자마자 소위 '나와바리'가 될만한 구역을  순회하고 나면 그 곳이 내 오래 살던 고향인 것처럼 아무 햇볕 아래나 앉아 한참동안 멍때리기 일쑤였다. 카이로에서 그러했고, 이스탄불에서 그러했고, 방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서울에서, 내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영위하던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 여행은 오로지 길 위에 있었다. 언제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있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길들이었다. 30시간동안 트럭을 타고 케냐 국경을 넘던 길. 짐바브웨 가는 길에 버스 기름이 떨어져 도로 위에서 한없이 기다리던 일. 세부에서 육지로 가는 배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기억. 그 외의 시간은 모두 삶이었다. 이동을 멈추고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 순간 삶이 시작되었다. 그건 하루짜리 삶일 때도, 일주일 짜리일 때도, 간혹은 한달 짜리 삶일 때도 있었다. 그러니 나의 떠남은 짧은 여행과 대부분의 삶으로 채워져 온 것이다.


더러는 사는 것처럼 여행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때도 있었다. 주인을 잘못 만나 낭비되는 돈과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허나 남들처럼 시간을 쪼개 충실하게 채우는 여행을 몇 번 해 본 결과, 사진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저마다의 삶의 방식이 있는 것처럼 저마다의 떠남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떠나 삶과 여행을 적절히 버무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 한강에서도 할 수 있고 내 방에서도 할 수 있듯 햇볕을 쬐며 멍하니 앉아 있거나 슈퍼에서 산 찬 맥주를 들이키는 시간이 소중하다. 그러다가 앉은 장소가 마음에 안 들면 훌쩍 어딘가로 떠나버리면 된다는 것이 한국에 있을 때와 떠나 있을 때의 유일한 차이일 것이다.


담배를 한 대 다 태우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켄조 매장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나는 잠시동안 무심히 그들을 관찰하다가 다시 고개를 파묻고 책을 읽었다.



방은 예정보다 늦게 준비되어 3시간을 벤치에 앉아 있어야 했다. 책을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담배를 네대나 피운 후였다. 아주 여유롭게 낭비된, 아니 살아진 3시간이 딱히 아깝거나 짜증나지는 않았다. 살듯이 여행하면 아쉬울 것이 없기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그만큼 적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틀어진 방에 돌아오자 문득 만 하루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삶이든 여행이든 사람은 먹어야 산다. 나는 어제 봐둔 중식당에 가서 덮밥을 먹어야겠다 생각하며 잠옷을 갈아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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