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해져 가는 것은 빠르다

다섯 번째 시

by 분홍색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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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해져 가는 것은 빠르다


어제의 일이 벌써 흐릿하다

또렷하지 못하고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색감이 번져있는 듯하다

그림 속 빨간색이 우체통이었는지 김치였는지

흐릿하다


아주 즐거웠던 순간임에 틀림없다

단언할 수 있다

근데 왜 즐거웠던 거지

환희의 모습 속 이유를 찾는 두뇌는 답답할 정도로 돌아가지 않는다


초등학생 때, 좋아했던 남자아이의 성이 ‘김 씨’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그 아이의 습관만은 또렷하다 웃을 때 입을 가리는 수줍은 친구였다

왜냐고 물었던 것 같다 대답은 기억나지 않고

그저 손으로 가리며 수줍게 웃는 모습만 떠오른다

수채화보다는 파스텔이 번진 것처럼


계속 찾아다녔다 나의 두뇌는

내 흐릿한 기억들 속 테두리 선을 찾으려 했다 선의 두께는 0.3이 좋겠다

즐거움, 슬픔, 기쁨, 분노, 아쉬움, 그리움,

내 모든 감정의 이유를 찾았으나 흐릿해진 기억은 돌아올 생각이 없다

선을 잃은 그림들은 한계점이 없이 자유로이 백지 위로 노닌다

색들은 형체를 잃었으나 힘을 가졌다

흐릿해져 가는 것은 빠르다

시간이 형체를 가져가 버렸다

이제 남겨진 것은 색뿐이다

끼워 맞추던 퍼즐의 힌트는 사라진다

왜 그 아이를 좋아했는지, 왜 그림 속에 빨간 물감을 썼는지,

과거의 나에게 묻지만 답을 얻을 수는 없다


흐릿해져 가는 것은 매일 이 순간도 늘어가고 있다

동시에 흩뿌려져 가는 색깔의 수도 늘어가고 있다



P.S 본 매거진에 사용되는 사진들은 본인이 직접 촬영한 사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