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모네이드 1화. 나로 존재한다는 것

스무 살에 구상한 소설을 한 편씩 연재해 볼까 합니다.

by 좋아서 하는 작가

유리창을 타고 들어온 햇살은 전시장 바닥에 얕은 물웅덩이처럼 번져 있었다. 벽에는 누군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필름 사진들이 일렬로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 관람객들의 그림자가 느릿하게 흘렀다. 전시장 안은 조용했다. 어떤 이는 사진 앞에 오래 멈춰 섰고, 또 어떤 이는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 몇몇은 벽 한쪽에 걸린 작은 사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사진 속 배경은 오래된 중고서점이었다. 빛바랜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책장 사이로 희미한 실루엣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초점은 맞지 않았다. 흔들리고 흐릿했다. 누군가의 부주의로 찍힌 장면 같았다. 그러나 사진 하단에 붙은 제목은, 무언가를 알리려는 듯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 쓰여 있었다.


<레모네이드>.


“이게 왜 ‘레모네이드’야?”
사진 앞에 선 한 여자가 물었다.


“제목이랑 너무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다른 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의 대화가 공중에 맴돌았고,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아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전시장 끝에 서 있던 남자, 이드. 그는 커피잔을 들고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찰칵.


그날, 이드는 중고서점의 한 구석에서 셔터를 눌렀고, 그때. 책장 사이를 레모가 빠르게 가로질러 지나갔다. 카메라를 들고 순간을 붙잡으려던 이드의 손이 잠깐 떨렸다.


사진 속 흐릿한 실루엣, 레모였다.


레모는 사진 찍히는 것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혹시 나 찍었어?”
레모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니, 그냥 배경일뿐이야.”
이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레모는 잠시 침묵했다. 다시 책장에 눈길을 주며 손끝으로 먼지를 털어냈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있잖아, 이드야. 나는 사진 찍히는 게 왜 이렇게 불편할까?”


이드가 카메라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글쎄. 네가 너 자신을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닐까?”


그 말에 레모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그럴지도 몰라.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좋아해 줄까?”


이드가 카메라를 들어 한쪽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나?”


레모가 미소 지었다. 그러다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이런 이유일지도 몰라. 한 장의 이미지가 나를 정의하는 것 같아서 불편한 거야. 내 모습이 왜곡된 채 남는 거잖아.”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흐릿하든, 선명하든, 빛나든, 어둡든, 그 순간의 너는 분명히 네가 아닐까? 네가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레모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섰다. 마치 뭔가 이해하려는 듯, 아니면 반박할 이유를 찾으려는 듯. 그러나 끝내 그는 이드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며칠 후, 레모는 이드가 찍은 사진 한 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은 흐릿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꼭 진짜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이드야.”
레모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 앞으로 네 카메라에 담겨 볼까 봐.”


이드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왜 갑자기?”


레모는 사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말했던 거 있잖아. 사진 속의 내가 진짜일 수도 있다는 거. 그 말이 좀 마음에 걸려. 나도 그걸 한번 믿어보고 싶어 졌달까. 물론 너만 괜찮다면.”


다음 날, 레모와 이드는 어제와 같은 장소로 향했다.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다. 중고서점의 좁은 통로는 먼지 쌓인 책들로 가득했지만, 그 안은 의외로 포근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레모는 책장 사이를 걸으며 손끝으로 먼지를 털어내듯 스쳐 지나갔다.


“이 서점 꽤 괜찮지 않아?”


레모가 책장 너머로 말했다. 이드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셔터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레모는 고개를 돌려 이드를 바라봤다. 그의 손에는 익숙한 필름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카메라 뒤에서 이드는 집중한 표정을 지으며 빛을 짐작하고 있었다. 서점의 한 구석에서 이드는 카메라를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레모의 뒷모습에 빛이 스치고 있었다. 그는 책장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셔터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런데 이드야. 너는 왜 이렇게 사진을 좋아하는 거야?"


레모의 질문에 이드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다. 카메라를 손에 쥔 그의 손끝이 약간 떨렸다. 이드에게 사진이란 단순히 누군가의 모습을 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존재하는 이유와도 같았다.


“사진은…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냥 그 순간을 남기는 거야.”


이드가 고민 끝에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모든 게 사라져도, 사진은 남아. 그 사람의 표정, 그 순간의 빛, 그때의 공기까지. 난 그게 좋아.”


레모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모든 게 남는다고? 하지만 결국 사진도 언젠가는 없어지잖아? 사진도 결국 종이라서 물에 젖으면 찢어지고, 불에 타면 사라지는 거니까.”

이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이야. 하지만 사진이 사라져도, 그걸 본 사람의 기억에는 영원히 남아. 적어도 난 그렇게 믿어.”


레모가 잠시 침묵한 채 이드를 바라봤다.


“그래, 너다운 대답이야.”


레모가 바라본 이드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깊었고, 그런 레모를 이드 또한 바라봤다.


다시, 느릿한 바람이 불어오던 전시장.


그날의 기억에서 돌아온 이드는 레모의 흐릿한 실루엣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레모를 떠올렸다. 레모는 대체로 밝았고, 사람들을 좋아하는 수다쟁이였다. 레모가 건네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빛나는 순간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금세 어둠으로 변해버리곤 했다. 레모는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고, 또 사라져야만 완전하다고 말하곤 했다.


“사라진다는 건 세상 모든 것의 결말이야. 조금 슬프지만 많이 아름답기도 하지.”


그렇게 말하던 레모가 지금 내 곁에 없다.


'레모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결국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진 걸까?'


하지만 이드는 레모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안감이 밀려올수록 줄곧 자신이 생각하고 믿어왔 것을 떠올렸다.


'보여? 너는 아직 여기에 있어. 비록 흔들렸지만... 적어도 내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곳에 함께 있을 거야.'


사진 속 흐릿한 레모의 실루엣은 사라지지 않을 유일한 순간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