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글쓴이를 닮았다. 이슬아 작가는 <부지런한 사랑>에서 글쓴이의 고유한 문체를 '글투'라고 부른다. 말하는 사람 모두에게 말투가 있는 것처럼 글 쓰는 사람 모두에게 글투가 있다고. 그런데 좋은 말투와 나쁜 말투처럼 글투 또한 고쳐지면 더 좋을 법한 것들이 있다. 예전에 들었던 글쓰기 특강을 통해 나는 내 나쁜 글투 하나를 알게 됐다. 바로 글에 반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문장부호 또한 글 일부이기에 느낌표 하나, 마침표 하나도 신중하게 써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독자의 시선을 불필요한 곳으로 분산시킬 수 있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브런치에 쓴 초기 내 글을 다시 보아도 정말 반점이 많다. 나의 나쁜 글투를 바로잡기에 앞서 나는 왜 이렇게 반점을 많이 쓸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첫째는 아마 영어를 전공한 탓에 간섭 현상이 발생해서 일 것이다. 영어 문장에서는 '접속사 주어 동사'로 이루어진 종속절에 반드시 콤마(,)를 넣는다. 나는 이것을 우리말 문장에도 적용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독자에 대한 과잉 친절일 것이다. 난 내 글이 쉽고 빠르게 읽히기를 바란다. 내가 쓴 반점은 '여기선 한 번 끊어서 읽으셔야 이해가 잘 됩니다.'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과잉 친절을 베풀곤 했다. 3월의 마지막 주에 있었던 일이다. 학교에서는 다음 달 석식 조사를 20일 정도 전에 미리 한다. 그 이유는 식재료 조달과 석식비 계산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리반 아이들이 자꾸 번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선생님, 혹시 4월 석식 신청 취소 가능할까요?" "선생님, 4월 석식 신청 지금 될까요?" 원칙적으로는 안 해주는 것이 맞지만 나는 과잉 친절을 베풀고 말았다. 나의 굽신거림과 영양사 선생님의 수고로움을 대가로 말이다.
문제는 그다음 날 벌어졌다. 안 된다는 원칙을 깨고 추가로 석식 신청을 한 학생 한 명이 다시 석식을 취소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지금 장난치냐"며 크레센도로 소리를 질렀다. 평소 친절한 모습만 보여줬던 나이기에 그 학생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나는 곧바로 과하게 화낸 점을 사과했다. 그리고 이유를 물었다.
"제가 좀 왔다 갔다 하나봐요. 죄송해요."
"너의 우유부단함이 누군가에겐 번거로움일 수 있어. 네가 두 번이나 석식 신청을 번복하는 바람에 영양사 선생님은 식재료 준비와 석식비 계산을 또 다시 하셔야 해. 3월 첫 석식 시간에도 그런 학생들 때문에 음식이 모자라는 일이 생겼잖아.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란다."
그 학생은 죄송하다고 했고 자신의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끼치는지 몰랐다고 했다.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 또한 과잉 친절을 반성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과잉 친절의 기저에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독자들의 지성을 의심했고 학생들의 성숙을 불신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것 또한 내 선택인 것을. 이미 브런치에 박제되버린 초기의 내 글을 고칠 수도 없고 3월 초로 시간을 되돌려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담임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슬아 작가는 <부지런한 사랑>에서 '이야기를 하는 표정'인 글투도 변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치 얼굴 표정이 고정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내 글의 나쁜 표정을 알게 되었으니 꼭 필요한 곳에만 반점을 넣기로 한다. 우리반 학생들에게는 딱 필요한 만큼만 친절하기로 결심한다. 아이들은 성숙한 사람으로 대접할 때 성숙하게 행동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