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홍차와 비엔나커피: 스무 살의

21. 어떤 여자의 음식 이야기

by 겨울꽃

벌써 구월도 중순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한여름에 입는 원피스를 입고 출근을 하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부터 켭니다.

오늘은 더운 데다 습하기까지 해서 장마철처럼 불쾌지수도 높아지네요. 올여름은 지금껏 내가 겪은 여름 중 가장 덥고 긴 여름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여름은 지금 가고 있는 중, 그리고 가을이 오고 있는 중이군요.


소매 없는 셔츠를 입고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청반바지를 입은 채 소파에 누워 사과를 입에 물고 책을 보는 이 계절의 작은 여유......

땀나고 더우면 샤워기 밑에서 찬물로 시원하게 씻을 수 있고, 어쩌다 아이들처럼 워터파크라도 가게 되면 파도풀 속에서 악악, 소리를 지르던 이 길고 뜨거운 계절이 점점 지나가고 있습니다.

시나브로 가고 있는 이 여름이 오늘은 문득 아쉽네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두 주 전에 갔던 카페의 차가운 커피 사진을 올리고 나서 상태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래도 여름이 좋아"


그러나 사실 여름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나'란 사람......

어느 계절이든 좋은 점 보다 싫은 점을 먼저 떠올리거든요.




열아홉 살이 되도록 나에게 가장 싫은 계절은 봄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나에게 봄이란 쌀쌀하고 못된 바람, 새 학년 적응, 봄 감기, 알레르기 비염 따위로 힘스런 계절이었어요.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날씨나 계절이 주는 정서에 무감각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군요.


대학에 입학한 스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봄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꽃의 의미도....

내가 굳이 '의미'라는 단어를 쓴 것은 봄을 알면서 이때껏 몰랐던 삶의 진짜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네 자매의 맏딸로, 잘하지도 못하면서 늘 공부와 책임감에 눌려있던 나에게, '스무 살의 봄'은 아주 가볍고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인생은 그렇게 우울하고 무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듯.....


그리고 그 사람도, 그렇게 봄과 함께 내게로 왔죠.


그와 함께 나는 처음으로 '봄 하늘'을 보며 감동하고 봄 햇살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며, 봄꽃들을 느끼고 즐기며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나의 삶이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맏딸로서의 올바른 삶이라고, 집안에 아들이 없는 대신 장녀가 살아야 되는 삶이라고 나는 교육받아왔고 옳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행복해야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고 동생들에게도 잘 사는 본을 보일 수 있을 텐데, 그때까지의 나는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곧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라, 강요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는 큰언니가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라 모르는 사이에 신념으로 굳어져버렸습니다. 요새말로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나요?


그런데 그렇던 내가 내 삶의 주체는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며, 주어진 내 삶에서 행복해야 할 주인공 또한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란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이 바로 '스무 살의 봄'이자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벚나무 아래서 자판기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과 따사로운 햇살아래를 걸으면서 외로움을 극복하는 법, 그리고 촉촉이 내리는 꽃비를 보며 내일을 준비할 계획을 세우고 아지랑이를 피해 도서관에 박혀 책을 읽는 일이 결코 우울한 일은 아니란 것을 나는 그에게서 배웠습니다.


봄만큼이나 달콤했던 스무 살의 내 사랑, 그....


삶이 그렇듯 그와의 사랑도 늘 그렇게 달콤하지만은 않았으나 내가 순수로 가장 빛나던 시절에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과 그를 만났던 봄, 그리고 찬란하던 벚꽃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이 아려옵니다.


다시 스무 살로 갈 순 없겠지. 그리고 그 사람도....


햇살아래 드러나던 하얗고 고르던 그의 치아와 검게 탄 어깨를 드러내며 열심히 배구를 하던 모습, 그리고 담배를 피울 때면 윙크하듯 한쪽 눈을 찡그려 내 가슴을 설레게 한.


내 안에 아직도 그는 스물넷의 청년입니다. 그리고 그를 떠올릴 때면 나는 아직도 스무 살입니다.

봄이 오는 한 말이죠.



이제 나는 싫어하는 계절이 없습니다.

모든 계절이 다 좋고, 모든 시간이 다 소중합니다.


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지금, 문득 첫사랑이었던 그 사람이 떠오르는군요.

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첫사랑의 그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가끔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남자, 즉 나의 남편이 그때의 그 사람이 맞나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혹시 나도 모르게 어느 겨울, 동굴 속에서 슈렉으로 변신을 했는지도...... 흐흐흐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와 함께 자주 갔던 학교 앞 카페 이상(李箱)에서 따뜻한 레몬홍차와 비엔나커피를 마시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사범대 앞을 지나 지금도 벚꽃 명소인 러브로드를 걷고 싶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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