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신경 쓸 일이 많아서인지 책을 읽어도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두껍고 내용이 어려운 책은 그 1장을 넘어가지 못하고 보람줄이 걸려있다.
한숨을 쉬면서 책장을 살피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고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집이 눈에 띄었다.
겉표지 안쪽에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짧은 기록이 있었다.
- 2009. 8. 1. 에 읽기를 마치다.
일주일 전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푹 빠져서 아끼며 읽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장영희 선생님의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사진을 통해서도 느껴지는 밝은 눈빛과 환한 미소.
꿈을 향한 나의 도전이 여러 번 실패하면서 나는 '실패'를 통해 '고통'과 '겸손'을 배웠다.
그러나 좀 더 일찍 선생님을 알게 되었더라면 실패를 통해 고통과 겸손에 더해 '감사'를 배웠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곁에 있으나 무심코 지나쳤던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다시 뒤돌아보게 하고, 행복인 줄 몰라 놓치고 있던 귀한 순간들이 행복임을 알게 해 주셨다.
선생님이 거닐었던 문학의 숲을 나도 따라 거닐면서, 후회하기 전에 소중한 사람들을 좀 더 많이 사랑하자고 다짐한다.
덧붙여 그다음 페이지에는 아들에게 쓴 메시지도 있었다.
- 사랑하는 나의 아들에게.
삶이 힘들 때
꼭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또한
삶이 기쁘고
날마다 즐거운 일만
가득할 때도
꼭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사랑하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너의 엄마가 (2009. 8. 1.)
이 책은 당시 모 신문사 칼럼에 게재했던 장영희 선생님의 글들을 엮은 것이다.
주내용은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을 선생님의 섬세한 감성과 일상의 일화들을 버무려 소개한 것이다.
선생님은 릴케의 시가 생각나는 '어느 봄날의 단상'에서 시작하여 '문학의 힘'을 끝으로 독자에게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면서 이 책을 마무리 짓는다.
'하면 된다?' VS '최선을 다하라'
고 장영희 선생님이 소개한 모든 작가와 작품들이 좋았지만 당시의 내게 가장 묵직하게 다가온 글은 '홀스또메르'라는 연극을 관람하고 쓴 제5장의 다섯 번째 글인 '하면 된다?'이다.
글은 고 장영희 선생님이 여행을 다녀온 한 학생으로부터 ‘하면 된다!’라고 써진 잿빛 자갈돌을 선물로 받은 데서부터 시작한다. 선생님은 비록 학생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하면 된다’란 말은 썩 좋아하는 말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면 된다’는 말은 즉 ‘이 세상에 노력이 있는 한 불가능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세상에 분명히 불가능은 존재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위장하는 것은 교육의 불성실이기 때문이다.
아이로니컬 한 것은 ‘하면 된다’라는 논리가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위압감이나 자괴감을 줄 뿐, ‘할 수 있는’ 사람들의 편리한 자기 합리화나 자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층계 하나를 못 올라가 곤혹스러워하는 휠체어 장애인에게 “당신은 할 수 있소!”라고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그가 벌떡 일어나 걸어 올라갈 리 만무하다. 그만큼 개인적으로 아무리 강한 의지와 노력이 있어도 할 수 없는 부분을 채워주는 것은 사회의 책임이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p.162~163)
다리가 불편하셨던 고 장영희 선생님은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문화생활과는 담을 쌓고 생활했으나 유인촌 씨가 출연하는 연극 '홀스또메르' 공연만큼은 학생들과 함께 오랜만에 관람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홀스또메르’는 톨스토이의 '어느 말에 관한 이야기'를 음악극으로 만든 작품이다. 얼룩빼기 말 홀스또메르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선생님은 극장 측에 목발 짚은 사람도 갈 수 있는지 문의를 하셨다고 한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장애인에 대한 특별 배려가 있다는 대답을 들은 후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가셨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 지정석까지 가서 앉는다는 것은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듯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선생님은 지정석 가장자리에 놓인 간이용 의자에 가까스로 앉아 연극을 감상해야 했다. 홀스또메르를 맡은 배우 유인촌 씨의 훌륭한 연기에 감탄하면서 연극을 보고 난 후, 선생님은 다시 학생들의 도움을 받으며 층계를 오르는 중에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유인촌 씨를 만났다. 불편한 몸으로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는 선생님이 안 돼 보였던지 펄쩍 뛰며 사양하는데도 유인촌 씨는 선생님을 둘러업고 층계를 올랐다고 한다.
지켜보던 학생들은 멋진 남자 배우의 등에 업혀 가는 선생님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며 부러워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마음으로는 많이 고마웠지만 그럼에도 불편한 몸으로 인해 좋아하는 배우에게 업히기보다는우아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자신이 아무리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신체적 장애로 인해 함께 동행한 여러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고, 좋아하는 배우에게 업혀 올라가야 했던 당시 상황에 대한 슬픔을 담담하게 서술하셨다.
글 말미에 선생님은 학생이 자신을 위해 사다 준 ‘하면 된다’고 쓰인 자갈돌을 버리지 않고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시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으면서 이 글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을 옆에서 붙들어주고 업어주는 그런 마음이 있는 한, 모든 사람의 노력이 헛되지 않고 ‘하면 되는’ 사회가 곧 오리라는 믿음의 표시로......(문학의 숲을 거닐다, p.165)
선생님의 글을 읽고 나서 잊고 있던 오래전 나의 좌우명이 떠올랐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각자의 좌우명을 적어 와서 아침 자습 시간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3분 동안 발표를 하자고 하셨다. 자기가 왜 그 좌우명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좌우명을 실천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친구들 앞에서 말해 보자는 것이다.
당시 나는 방학 숙제로 읽었던 미국 육상선수 ‘존 베이커’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던 터라 그가 했던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나의 좌우명으로 정해 두고 발표 준비를 했다.
나의 차례가 된 아침, 떨리는 마음으로 좌우명 발표를 끝내고 나니 친구들과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존 베이커’ 이야기와 ‘최선을 다하라’는 좌우명은 친구들과 선생님에게도 그만큼 울림이 컸나 보다.
그때부터였을까.
원래도 꾀부릴 줄 몰랐던 내가 작은 일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된 것이.
나는 공부는 물론이고 교실 청소를 할 때나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고 동생들을 돌볼 때도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썼다.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나만의 최선.
덕분에 나는 우등생에다 매사 성실한 모범생이 되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행복한지는 각자에게 물어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학창 시절의 나는 선생님과 부모님께 인정받으며 행복감을 느꼈던 사람인 것 같다.
그렇게 나를 성장시키던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그러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일단 주위 사람들부터 불편하게 했는데, 내가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들이는만큼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비난하는 마음이 생겨나곤 했다. 대충하는 걸레질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동생들을 혼내고, 열심히 했어도 성과가 좋지 않은 친구에게 위로보다 먼저 최선을 다했는지 물었다.
나는 뜻하지 않게 '완벽주의형 인간'이 되어 별일 아닌 것에도 마음을 쏟아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해 마친 일의 결과가 기대했던 것과 다를 때면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최선을 다했는가?’라는 물음으로 둔갑해서 납덩이처럼 나를 짓누르곤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누군가가, 노력한 그 과정이 훌륭했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들인 노력과 정성만큼, 최선을 다한 시간만큼 아파야 겨우 제자리에 올 수가 있었다.
나를 일으키고 성장시키던 '최선을 다하라'는 좌우명.
그것은 어느새 스스로를 찌르는 비수가 되어 끝없는 우울감과 무력감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토록 애를 쓰고 마음을 다했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눈물 흘렸던 시간들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이 세상엔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고, 정성과 노력을 들여도 이룰 수없는 일이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스스로의 교만함이었다.
'시간'이라는 현명한 해결사는 하면 된다는 정신과 최선의 노력으로도 바라던 바를 얻지 못했던 '실패의 경험'을 선물함으로써, 어리석은 내가 스스로 만든 좌우명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어쩌면 나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하면 된다는 것이 곧 목표 도달이나 성취, 성공과 같은 말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남들에게는 나와 같은 ‘열심’이나 ‘최선’을 바라지 않는다. 부탁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어떤 일이건 기왕이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고 싶다.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최선이 꼭 최고의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결과가 어떻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상황에 따라 어떤 일은 그냥 대충 흘려보내면서 몸도 마음도 편하게 지낸다.
내가 가진 것을 남은 가지고 있지 않고,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을 수가 있다.
'하면 된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의 체력과 정신력, 즉 능력이 똑같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아다시피 고통을 체감하는 역치 수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능력 또한 그러하다.
고 장영희 선생님은 '하면 된다'의 뒤에 물음표(?)를 붙여둠으로써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신념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는 사람들은 없는지 살펴보게 한다.
하면 된다고? 과연 그런가? 하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에 따라 주어진 환경이나 여건이 다르다보면 같은 일에 도전할 때, 누군가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그 누군가가 받는 상대적 박탈감은 의외로 크다.
'개인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일.'
그것이 강한 정신력과 최선의 노력으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목표를 기적과도 같이 이루어낸 사람이, 그렇지 못한 누군가를 향해 낼 수 있는 가장 처음의 마음씀이 아닐까 싶다.
나도 할 수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고, 그러니 힘을 내라고, 능력껏 최선을 다하라고 주문하기 전에 힘들어하는 상대의 약함과 어려움을 먼저 인정해주고 다독여줄 때 그는 오히려 하고자 하는 용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나만큼 하지 않았다고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일의 결과는 본인이 책임지면 그 뿐이지만, 타인을 향한 비난은 비난받는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 뿐 아니라 때로는 생명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