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주 오랫동안 아팠다. 그사이 일을 그만뒀고 병원에 다녔고 치료를 위한 운동을 다녔다. 그렇게 오 년이 지났고 나는 어느새 나아졌다. 통증이 시작된 것이 2018년, 나의 재활선생님으로부터 이제 운동을 그만 나와도 된다고 들은 것이 2023년 9월이다. 그때부터 나는 자유가 됐다. 매주 가던 운동 스케줄도 없으니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면 될 것 같았다는 게 나의 희망적인 생각의 마지막이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도 하고 싶지 않고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한 달에 스무 권씩 읽어대던 책에도 심드렁해지고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열심이던 다이어리 쓰기에도 무심해졌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손에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잡으려 하는 게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아무것도 하고 싶어지지 않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팠던 5년 동안, 우울에 빠져있긴 했지만 뭔가를 향한 의욕은 분명히 있었다. 글을 쓰고 싶었고, 책을 쓰고 싶었고, 노래를 만들고 싶었고, 문구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모두 다 했다. 종종 노래도 만들고 글을 꾸준히 쓰고 문구를 만들어 온라인문구점을 운영하고 종국에는 책을 하나 써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열정이 끝났다.
운동을 그만 나가기 시작한 것이 2023년 9월. 그리고 나의 첫 책이 나온 것도 그해 9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모두 사라져 버린 그때, 그 시기가 겹친 것은 우연일까. 몸은 나아졌고 몇 년간 목표로 했던 결과물을 손에 쥐었던 그때, 나는 더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았지만 제자리에 머물렀다.
아니, 제자리에라도 머물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뒤로 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만 있었다. 가을바람이 좋아도 산책도 하러 나가지 않았다. 시간이 모두 내 것인데도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무기력의 블랙홀에 빠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어떤 것에도 의욕이 없는 상태. 그렇게 이 년을 보냈다.
그렇게 오래 누워있어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등이 아플 때까지, 등이 아파도 계속 누워만 있었다. 하루에 몇 시간을 누워있었는지 모르겠다. 누워있지 않은 시간을 헤아려보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 그 시간들을 제외하곤 모두 누워있었다.
그래도 꿈틀거릴 때가 있었다. 수영을 몇 달 다녔고, 제과 수업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걸 할 의욕이 들었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지금은 그때보다도 의욕이 없다.
일을 시작하기도 했다. 사실, 하고 싶어서 라기보단 이제 좀 돈을 벌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에서였다. 뭔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나, 밥값은 벌어야 하지 않나 같은 생각들. 그렇게 일을 시작했고 여러 가지 이유로 괴로워하다 4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번역수업을 들었다. 사람을 만나고 가르치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남은 삶은 혼자서 평화로워지고 싶었다.
그런데 평화롭지 않았다. 내 영어실력이 너무 부족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를 받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점점 커졌다. 그 무렵 다시 목과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예전의 통증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2년 만에 필라테스 센터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다시 아파졌다는 좌절감이 컸다.
그 와중에 일을 다시 시작할 결심을 했다. 번역공부를 해보니 내 실력이 여의치 않고, 이전에 그만둔 직장에서 대타를 해달라는 연락이 와 며칠 해보았더니 이전보다 힘들지 않았다. 집에만 있다가 나가니 환기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며칠을 고민하다 원장님께 다시 일을 하고 싶노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한 달 후, 다시 같은 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을 하고 있다. 일은 사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세상에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나도 여튼 하고 싶지 않지만 그냥 일이라 하는 부류의 하나다. 사실은 굉장히 하고 싶지 않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럼에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이걸 그만둔 후의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직장은 집에서 3분 거리에 근무시간이 세 시간 반이다. 일하는 내용에서 스트레스를 받건 어쩌건 이런 조건의 일자리는 다시 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냥 한다. 원하지 않지만 벗어날 수 없는 상태, 그 상태가 나를 괴롭게 한다. 하지만 방법은 없다. 그냥 산다.
일은 하고 있지만 무기력은 여전하다.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다. 내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나를 더 무력하게 만든다. 이 일이 싫으면 다른 하고 싶은 게 있어야 할 텐데, 없다. 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운동을 간 날이었다. 나를 오 년이나 봐 온 나의 운동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혜린님은 생기가 없어요.’
나는 나도 알고 있노라고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아니던가. 생기가, 기운이, 기력이 없다. 살고 싶은 의욕이 없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저는 혜린님을 살려야겠어요.’
나도 내가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다른 이가 나를 살려야겠다고 말했다. 나를 살려야겠다고.
집에 오는 길에 그 말을 곱씹으며 펑펑 울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내가 내팽개쳐둔 나의 삶. 죽어가고 있는 우리 집 거실의 화초처럼 시들어가고 있는 나. 그렇게 몇 년을 살아온 나. 그런 나를 살려야겠다니.
이 글은 그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가까운 이에게도 할 수 없던 말들을 삼키고 삼키며 살던 나를 꿰뚫어 본 누군가의 사려 깊은 한 마디. 어쩌면 나를 살릴 수도 있는 말.
‘저는 혜린님을 살려야겠어요.’
그러니 나도 이제 나를 살려볼 수 있을까. 살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까.
이것은 기록이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은 어떤 이의 발버둥, 몸부림, 마지막 외침. 글을 끝맺는 어느 때에 나는 무기력에서 벗어나 살아있기를. 죽는 듯 살지 않고 사는 듯 살아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