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추석 무렵 작성된 글로 예시나 논조가 현시점과 어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베테랑 2>와 <무도실무관>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베테랑 2>(2024)를 보면서 기시감을 느낀 관객이라면, 그것은 전작인 <베테랑>의 영향이 아니라 2000년대 초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만화 <데스노트>(2004)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구성, 메시지, 캐릭터까지 이 작품은 여러모로 <데스노트>를 그대로 답습한다. 극중에 짧은 인서트로 마이클 샌댈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추며 작품의 근원이 '트롤리 딜레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내게 이 영화는 <데스노트>의 현대판 각색처럼 보인다.
이름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노트를 중범죄자 처형에 쓰기로 한 주인공, 목적달성을 위해 '키라'라는 본래의 신분을 숨기며 경찰에 근무하는 아버지의 정보를 마음대로 탈취하는 것, 일본 전국 1등이라는 두뇌에 걸맞게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 사법제도에 불신을 갖고 키라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나팔수로 키라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메가와라는 인물, 범죄를 혐오하는 피해자에게 접근해 오른팔로 삼는 동시에 '가짜 키라'를 만드는 야가미 라이토의 행적까지.
분명히 <데스노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비슷한 딜레마, 따뜻함과 차가움을 오가는 주인공의 소시오패스적 시선까지 닮은 구석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전작보다는 <데스노트>에 가까운 영화라고 먼저 말해두는 것이다.
다만 야가미 라이토가 숙적 L과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인 것과는 달리 <베테랑 2>는 그 두뇌 싸움을 주먹으로 바꾸어 놓았고, 인물 구도가 조금 바뀌었다. 그리고 도스도옙스키의 소설『죄와 벌』에 등장하는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 를 답습한 캐릭터들이 흔히 보여주는 '우수한 인간이 죄를 저지르고 스스로를 변명'하는 과정이나 '데스노트'와 '사신' 같은 판타지 요소가 결여돼 있다는 점은 분명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현실적인 부분과 한국 정서에 맞는 부분은 차라리 드라마 혹은 동명의 웹툰 <비질란테>(2023)를 닮았다.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루하진 않았지만(아마 다른 작품과의 공통점 찾기 때문일까), 어느새 연작이 되어버린 <베테랑> 시리즈 자체의 세계관을 놓고만 봤을 때 <베테랑 2>의 임팩트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막장 재벌 아들 조태오를 상대하던 베테랑 형사가 새롭게 상대한 맞수 치고는, 새 빌런이 아무래도 약해 보이긴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애초에 서도철이 상대하고 있던 건 조태오의 비윤리성 그 자체였지 범죄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통일성도 깨지는 느낌이 든다.
연휴 기간 넷플릭스의 TOP 10 영화 순위(2024.09.19 기준). 재미있게도 넷플릭스는 <베테랑> 홍보를 해주고 있는 셈이 됐고, 극장에서는 <무도실무관> 광고가 나온다
그러나 나는 <베테랑 2>에서 드러나는 기시감보다는, 그 주제에서 드러나는 기시감에 주목하고 싶다. 최근 자꾸만 반복되는 사법불신과 사적제제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혹형주의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커져가는 것에 대해 영화가 경고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베테랑 2>가 극장가에서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사이 넷플릭스에서는 <무도실무관>(2024.09)과 <드라이브>(2024.06)가 나란히 1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결은 다르지만 주제 측면에서는 최근 논란이 되는 사항들에 관해 시의성 있는 접근을 하고 있는데, 공통점으로 발견되는 부분이 있다.
먼저 <무도실무관>은, 강력범(주로 성폭행범)을 감시할 '무도실무관' 업무를 맡게 된 주인공이 현장에서 점차 자신의 직업정체성을 찾아간다는 내용으로, '나쁜 놈들은 시원하게 두들겨 패자'는 요즘 범죄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모양새다. 강력범들의 짧은 형기와 재범 우려, 그리고 시민들의 불안감이 반영된 가운데 영화 속 주인공이 대신해서 벌을 주는 영화 문법은 이 작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다만 여기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동성폭행범 조두순이 출소하던 당시 사건을 모티프로 하는 장면에 있을 텐데, 이 장면은 <베테랑 2>에서도 마치 복사라도 한 듯이 똑같이 등장한다. 출소한 범죄자가 새로운 거처로 이동하는 동안 시민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길을 막고, 더러 호송 임무를 맡고 있는 경찰들에게까지 폭행을 가한다. 사건을 중계하는 인터넷 방송 BJ와 유튜버들이 등장해 조회수를 늘리기 위한 과한 언행을 하는 것까지 판박이인데, 어째 영화의 뉘앙스는 군중들에게 우호적이지는 않다.
(위)<무도실무관>의 범죄자 호송 모습 (아래)<베테랑 2>의 범죄자 호송 모습
<무도실무관>과 <베테랑 2> 모두 범죄자의 이동을 가로막는 군중들은 일종의 장애물처럼 묘사되며, 명확하게 뜻이 전달되지 않는 시끄러운 아우성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 위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인터넷 방송 진행자들은 그 장면 속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서 공권력을 내리까는 형태로 연출이 되고, 그들의 태도 역시 법집행자들을 넘어선 어떤 가치가 뒤라도 봐주는 듯 떳떳하게 그려진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것들이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음은 최근에 폭풍처럼 몰아닥친 유튜브의 사적제제 논란과 잇따른 '렉카 유튜버'들의 비위로 만천하에 드러난 바 있다. 사람들은 연이은 강력 범죄자 솜방망이 처벌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사법 불신을 외치며 대신 분노의 외침을 전달할 나팔수를 찾았다. 문제는 정치색만 진한 황색언론과 레거시 미디어에 실망하고 떠난 사람들이 기껏 선택했다는 것이 소위 사이버 렉카였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이 일정 부분은 잊힐 뻔한 사회의 어둠을 드러낸 공훈이 있기는 하나, '정의'를 다루기에는 그들 스스로가 정의롭지 못했다는 게 문제다. 일찍이 필자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방법(원문 : '선과 악을 구별하는 방법')에서 논한 적이 있듯이, 정의라는 것은 한 평범한 개인이 다수의 대리자로 나서서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영웅이 아니라면). 민주주의의 치열한 토론과 논쟁 끝에 세워진 몇 마디의 문장들, 성문화된 법률과 개인이 접근할 수 없는 제도와 시스템 안에서나 겨우 동작할까 말까 한 거대한 것이 정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분노의 감정 속에서 정의를 너무도 가볍게 목소리 큰 사람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범죄자에 대한 분노의 물결이 범죄자를 향해있는 것을 넘어 주변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광경을 '요즘 영화'들이 경계하고 있다. <베테랑 2>에서는 아예 경찰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인터넷 방송 진행자를 묘사하기까지 했으니.
납치범에 의해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생방으로 돈을 벌어오라는 미션을 받은 주인공. 아무래도 이 작품의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전에 로드리고 코르테스 감독의 <베리드>(2008)와 얀 드봉 감독의 <스피드>(1994)를 재밌게 본 듯하다
그런 점에서 영화 <드라이브>는, 극장과 넷플릭스 속에서 유사한 장면으로 쌍끌이 중인 두 영화의 질문에 함께 이끌려 나온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유튜브나 인터넷 방송을 즐겨보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의 개연성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당혹스럽겠지만 어쨌든 대중들이 추석 연휴 내내 이 영화를 끌어올렸다는 사실만큼은 중요하게 다가온다.
드라마 <더 에이트 쇼>(2024)에서 참가자들이 기행을 저지를 때마다 시간을 주는 익명의 시청자들이 그러했듯이, 한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대중들의 조종술은 생각보다도 더 파급력이 크고 위험한 것이 아닐까? 그나마 재미를 좇으며 흥미에만 관심을 두는 정도라면 모를까, 어쩌면 우리 삶의 양식을 바꿀 수도 있는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확실히 경계할만한 것이 아닐는지.
다시 <베테랑 2>를 들여다보자. <베테랑 2>의 악당으로 등장하는 선우는 극중에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인 한편 현실의 관객들에게도 심정적으로는 가까운 존재일 수 있다. 강력 범죄자가 검찰의 구형보다 적은 형량을 받았다는 뉴스에 일괄적으로 쏟아지는 '사형을 해라' 혹은 '똑같이 만들어줘라'라는 댓글, 그리고 공감수.
그런데 극중에서 선우는 어떻게 묘사되는가. 시종일관 베테랑 서도철 형사의 의심을 사는 인물이며, 위험천만한 인물로 그려질 뿐이다. <무도실무관>에서도 그렇게 떠들썩하게 동네를 시끄럽게 했던 나팔수들은 사라지고 끝내 적대자와 대적하는 건 직책명도 낯선 무도실무관 이정도 혼자다.
의식을 잃어 듣지도 못하는 범인에게 끝까지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주인공
나는 연휴 기간 동안 극장과 넷플릭스를 휩쓸어버린 작품들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렬로 세워놓은 무언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만화 <데스노트>에서 범죄자를 소탕하는 '키라'로서 이미 종교적 수준의 지지를 받는 야가미 라이토가 목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까지 살해하는 순간부터, 이상을 감지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나온다. 살해당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키라는 정의가 아니다'라며 생방송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대놓고 반기를 드는 한 아나운서처럼 말이다.
시스템이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대중들이 갈망하는 '정의'를 둘러쓴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하려드는 캐릭터가 <베테랑 2>의 선우다. 그리고 그 선우는 가짜정의에 희생된 인물과 가짜정의를 만드는 인간을 인질로 두고서 함정을 파지만, 서도철은 선우의 시험에 응하지 않는다. '조서로 죽여버리겠다'는 그의 말처럼 혈투 끝에 심장이 멎어버린 그를 어떻게든 살려내고, 설령 약해빠진 법일지언정 소크라테스의 독배를 마시기로 한다.
<무도실무관>의 주인공 정도가 어설프게 외우던 미란다 원칙을 종래엔 의식을 잃고 듣지도 못하는 성폭행범에게 똑똑하게 들려주듯이, 허울뿐이고 명분뿐인 공허한 외침이라도 해야 할 것을 분명히 실행하고 이성과 덕을 갖춘 시민이 해악을 마주하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놈들이니 우리도 끔찍한 짓을 저질러도 될까. 혹은 기준없이 아무나 집어넣던 공포정치 시절의 통제된 사회가 복원될지언정 혹형주의를 부르는 것이 옳은가. 이런 주제를 다룰 때마다 꼭 하고 싶은 말은, 역시나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에 등장한 오 과장의 대사만 한 것이 없을 것 같다.
"내 이 친구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보여드릴까요, 형님? 그만두게 해요. 사람이 짐승을 상대하자고 짐승이 되면 되겠수?"
가짜 정의를 둘러쓴 선우가 아니라, 서도철이 그랬고, 이정도가 그랬던 것처럼. 통쾌한 액션 영화들 사이에 숨은 진짜 결말은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본문 사진
-영화 <베테랑 2>(2024) 스틸 컷
-영화 <드라이브>(2024) 스틸 컷
-영화 <무도실무관>(2024) 중
-넷플릭스 홈 화면 '오늘의 TOP 10 영화'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