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자의 시간

by 민경민
*영화 <사냥의 시간>(2020) 스틸



어릴 적의 나는 '남성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밤새 책을 읽다 코피를 터트리기 일쑤였고, 또래들이 축구를 할 때 그림을 그리거나 혼자 레고를 가지고 놀았다. 언제나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들은 소위 '남자답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동도 젬병이었고 싸우는 것은 죽어도 싫었지만 남자들 뿐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흉내라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자답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살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받았으나 내색은 할 수 없었다.


영화 <사냥의 시간>은 여성 서사가 득세하는 극장가에서 보기 드물게 젊은 남성들의 삶을 주목한 영화다. 각계각층의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와중에 소외된 계층이 있다면 의외로 젊은 남성들이 아닐까 싶다. 미국의 사회운동가인 토니 포터는 '남성이면 이 정도쯤은 해야지', '남자답지 못하게 왜 그래' 등 남성의 행동을 제약하는 사회적 편견을 '맨박스'라고 정의했다.좋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대안 없이 험지로 끌려가야 하는 남성들의 삶 속에서 사회는 남성성을 강조하며 무한한 희생을 요구한다.


극 중 묘사된 각종 범죄들은 사회에서 남성에게 할당된 험한 일들을 은유하는데, 특히 준석이 3년 동안 다녀왔다는 감옥은 군대를 의미하며, 천식으로 면제받은 장호(안재홍)를 제외하면 주인공 모두 예비역이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군대를 갔다 오자 모아둔 돈이 휴지조각이 되고 '새로운 가치'인 달러로 환전조차 하지 못했다는 건 군대에서의 이력이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과 그 사이의 공백이 아무런 보장도 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험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는 기간산업을 지탱하는 노동자를 '하급' 취급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이 적절한 보장을 받게 하는 데에도 매우 인색하다.


*영화 <사냥의 시간>(2020) 스틸


근데 우리 준석이 없는 3년 동안에 아무 짓도 안 하고, 나름 성실하게 살았어. 그래 가지고 우리 인생 뭐가 달라졌어? 더 X같아.

<사냥의 시간>, 장호 대사 중



하지만 젊은 남성들이 처한 상황이 하루 이틀 만에 갑자기 벌어진 건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젊은 남성은 군역, 노역에 동원되며 사회 발전의 도구로 쓰였다.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남자의 생물학적 필요성은 소수로도 충족되기에 그들은 소모품처럼 험한 곳에서 죽음으로 내몰렸다. 미국 31대 대통령 후버가 "전쟁은 노인들이 일으키고 피를 흘리는 것은 청년들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애당초 젊은 남자의 존재는 사회와 국가에 이용당하기 딱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농경시대는 두말할 것도 없고, 산업시대에도 남자의 근력은 유용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산업이 첨단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유용하다. 인류의 지식을 습득하면서도 '정밀 생체 로봇'으로서 다양한 산업에서 험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남자의 육체는 값싸고 헌신적인 것일수록 이득이 된다. 하지만 남자도 생명인지라 높은 보수를 주는 것만으론 목숨이 걸린 위험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세뇌가 필요했다.


죽을 만큼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게 하려면 그것이 대단한 것인 양 포장하면 된다. 남성성의 강요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한 인간이 종 전체적인 고유한 특성을 공유할진 몰라도 각 개인의 선호나 추구는 다를 수밖에 없음에도 '남자답다'라는 말이 씌워지고, 젊은 남자는 무슨 일이든 극복해야 하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나약함을 보이면 곧장 사회에서 도태당할 기세로 위협당한다.


*영화 <사냥의 시간>(2020) 스틸



극 중 준석(이제훈)을 비롯한 네 주인공이 시종일관 괜찮지 않으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표현이 목줄처럼 걸려있는 시대에서 남자로서 조금의 허점도 보이지 않게끔 자라왔기 때문이리라.


정해진 남자의 세계 속에서 그들은 못하는 것을 잘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고, 원하지 않아도 소위 '센 척'도 해야 했다. 시종일관 입에 욕을 달며 몸에 문신을 새겨 넣은 네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해변에서 낚시나 실컷 했으면 좋겠다는 순박한 꿈이 있어도 언제나 '남자에게 걸맞은 일'은 존재했고 그리로 내몰렸다.


일이 꼬일 때마다 괜찮다며 말 못 할 눈빛으로 속내를 주고받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강한 유대감이 느껴지는 건 꼭 그게 영화 속 이야기라서만은 아니다. 서로의 처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내보낼 수 있는 눈빛들. 이 영화에서 특히 주연들의 눈빛 연기가 빛나는 까닭은 이미 배우이기 전에 젊은 남자인 그들이 그런 세계를 살아왔기 때문은 아닐까.



이사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중략)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중략)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중략)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중략)일렬로 선 아이들은/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기형도, <전문가> 중



'짜인 판' 속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본 준석 일행은 마침내 총기를 들고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도박장-국가를 공격하지만 '판옵티콘의 감시 원리'를 훔친 대가로 국가의 의지로부터 사냥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언제까지나 헌신해야 할 부류들이 저 살겠다고 발버둥 친다면 어떤 대혼란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군대를 거부한 이들이 징역에 처해지듯이(요즘은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만) 준석 일행은 충실한 집행관 '한(박해수)'에게 추적당한다.


사실 한에 대해서는 영화의 구성 자체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미치광이 살인마 안톤과 모스의 돈가방을 두고 벌이는 추격전을 오마주한 것이라 절로 안톤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데, 안톤이 인간 세계에서 극악함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데 반해 한은 국가의 의지가 공포로 표현되었을 때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보여주기에 이 둘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은 의문을 가진 젊은 남자를 사냥하는 국가의 의지가 구체적 이미지로 표현된 캐릭터다. 그가 목표를 추적해 원하는 것을 회수했음에도 꾸준히 살려두면서 공포를 심는 까닭은 그 공포를 같은 처지의 인간들에게 널리 퍼트려 반격의 의지를 상실케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문과도 같아서, 인간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최악의 형벌과도 같다. 법의 규정에 맞게 처벌된다면 차라리 끝이 있을 테지만, 법 밖의 형벌은 공포의 의지가 널리 퍼질 때까지 끝이 나질 않는다.



준석아, 법 밖에 있는 세상이 더 무서운 거다.

<사냥의 시간>, 봉식 대사 중



준석 일행은 사회와 국가가 이용해먹기 위해 정의한 '남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자 탈출을 결심하지만 끝내 국가의 감시를 피하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져간다.


결국 준석은 그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사회의 도구로 완벽하게 전락하지 않는 한은 이 사태가 끝나지 않음을 직감한다. 이게 도망만 치던 그가 돌연 총을 집어 들고 다시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향하는 이유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젠더 갈등을 불러일으킬 필요(사실 이처럼 바보 같은 일도 없다만)는 없다. 다만 이 작품과 글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사회 발전의 맹목적인 기계로 만들고 이익을 취하려는 '저 높은 곳'의 보이지 않는 손들로부터 해방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영화가 굳이 '남자'가 아닌 '젊은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라.


불합리한 행태에 의문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무기가 되어준다.


먼저 그러기 위해서는 부조리에 놓인 이들이 서로를 지각하고 돌볼 줄 알아야 하며, 이것이 언제나 인류가 파멸적인 지옥 속에서 삶을 구원해낸 원리가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이 좋았다면 '구독하기'로 작가에게 힘을 보태주세요




*20.04.29 기준 다음 영화 메인 및 카카오톡 탭에 게재되었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환경 오염'이 아니다. '자본 오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