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검음'에 도달한 반타 블랙.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검정색이다. 그러나 어딘가 낯설다. *사진 : 나무위키, 반타 블랙
인간은 분자 구조를 조작해 빛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완벽한 검음’을 얻었다. ‘반타 블랙’이라고 알려진 이 검은색은 너무 검은 나머지 공간에 구멍을 뚫어버린 듯한 착시효과까지 일으킨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검은색을 보고 먼저 완벽하다는 느낌보다는 이상하다거나,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왜일까? 세상의 어떤 검은색보다도 검은데 말이다.
우리가 반타 블랙에 이질감을 느끼는 까닭은 그야말로 ‘검음’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검은색의 전형은 ‘그림자’다. 사실 그림자는 완전한 검은색이 아니다. 그림자가 비친 물체 본연의 색깔의 가장 어두운 ‘빛깔’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검은색들은 대개 검지만은 않다. 가령 검은색으로 칠해진 고급 세단에는 검은색 위로 비치는 광택 같은 것들이 존재하고, 어떤 검은색은 그리 검지는 않지만 주위가 밝기 때문에 검게 보인다. 즉, 검은색은 상대적인 것이 함께 있을 때 가장 검은색답다.
'완벽'은 단일한 것, 순도 100%의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언급했듯 지나침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마치 용기가 지나치면 ‘무모함’이 되고, 용기가 모자라면 ‘비겁함’이 되듯이 말이다.
극중에서 '백조의 호수' 공연 대미를 장식할 ‘스완 퀸’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지휘자 토마스(뱅상 카셀)가 후보 니나(나탈리 포트만)에게 ‘백조는 완벽하지만 흑조로서는 부족’함을 계속 설파하며 아쉬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순수함과 고결함도 그 이면의 타락과 부정이 있을 때 완성된다. 완벽한 선의는 그에 대응하는 악의가 있을 때 진정한 빛을 발한다. ‘백조의 호수’ 속 ‘스완 퀸’은 그 정점이고, 백조만큼이나 악랄한 흑조가 대비되어야 비로소 완벽한 순수를 맛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블랙 스완>에서 자주 등장하는 ‘거울’의 이미지는 그 상대성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재료가 된다. 거울에 비친 모든 이미지는 본체를 그대로 투영하기도 하지만, 그 방향은 반대가 된다. ‘이쁜이(Sweet girl)'로만 자라온 니나에게 흑조의 그 무엇은 없다. 타인이 원하는 모습, 엄마가 원하는 모습대로 자라온 니나에겐 저항이나 성인으로서 주체성 따위는 결여돼있다. 하지만 그렇게 자라온 니나가 뒤늦게 흑조의 모습을 자기에게 투영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니나는 ’흑조의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흑조' 릴리 *사진 : 다음 영화 <블랙 스완>(2011) 스틸
하지만 니나는 곧 흑조를 직접 보게 된다. 같은 발레단 소속의 릴리(밀라 쿠니스)의 발레는 서툴지만 마음가는대로 행하는 자유로움이 있다. 토마스 역시 니나가 릴리의 그런 점을 본받길 원한다. 사실 극중에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토마스는 니나에게 흑조를 보여주기 위해 릴리를 의도적으로 접붙였을지도 모른다. 토마스는 이미 니나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어떤 저항성, 흑조를 봤기 때문(특히 니나가 토마스의 입술을 깨무는 장면에서)이다.
흑조를 지배하는 근간은 자유, 그리고 원하는 것은 얻고야마는 열망이다. 니나는 그녀의 대역을 맡은 릴리를 통해 위기에 처한 열망에 '질투'라는 생명력을 부여하고, 릴리와 함께하는 순간은 니나의 내재된 성적 자유를 깨우며 타자성의 굴레조차 복속시킬 수 있는 저항력을 부여한다. 이처럼 릴리는 니나의 거울로서 철저히 흑조의 본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릴리와 엮이게 되는 순간부터 니나의 거울은 조금씩 변화를 보인다. 움직이지 않는데도 고개를 제멋대로 돌리는 거울 속 ‘또 다른 나’처럼. 오롯이 비추는 대상을 따라해야할 거울 속 이미지가 마음대로 행동한다. 물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니나의 심리작용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니나의 자아를 상징하는 거울은 이미 ‘변화’한 것이다.
니나를 거울에 비추면 백조 한 마리가 투영될 뿐이었다. 하지만 릴리에게서 전염된 흑조의 근원은 그녀 거울-자아 속에 흑조를 비추게 만든다. 즉 한 사람에게 백조와 흑조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니나의 백조는 대칭점인 흑조를 얻음으로써 완벽에 가까운 순수를 얻게 될까? 그건 아니다. 니나의 흑조는 여전히 거울 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니나의 몸속에 봉인된 흑조는 니나의 피부를 뚫고 나오지 못한다.
내재된 억압은 현실의 표피를 뚫어야만 비로소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순간, 백조와 흑조를 마음대로 불러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완벽’을 얻게 될 것이다.
어머니의 억압은 니나의 자아를 가두는데 일조한다. *사진 : 다음 영화 <블랙 스완>(2011) 스틸
니나의 자아는 뒤늦게 본연의 자유를 갈망하지만 내면에 자리 잡은 ‘흑조’는 니나의 피부를 뚫고 나오진 못한다. ‘나’라는 존재가 내 몸속에 고여 있는 존재라면, 우리의 외피를 이루고 있는 피부는 남에게 보이는 전부다. 즉 니나의 자아가 피부를 뚫고 나오지 못함은 그녀의 자아가 타인의 시선 혹은 억압을 뚫어버릴 만큼 강하지 않다는 방증이 된다.
인간의 의식 단계 중 자기 검열을 수행하는 '초자아'는 인간이 막무가내로 행동하지 않도록 만들어주지만 때로 그 자체가 감옥이 되기도 한다.
니나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초자아 역시 시종일관 그의 어머니가 한때 꿈꾸었던 ‘완벽한 백조 여왕’이 될 것을 명령한다. 니나를 임신함으로써 이뤄지지 못한 어머니의 꿈은 니나에게 죄책감이자 족쇄가 되어 어떤 반항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이끌고 그저 어머니의 이상에 따르게끔 한다. 완전한 순수와 고결을 위해서 철저히 통제되는 자기 자신의 삶. 허나 앞서 말했듯 완벽한 백조 여왕은 그 이면의 흑조가 있어야만 완성된다. 그런데 니나에게 심어진 초자아는 완벽한 백조 여왕을 추구하면서도 니나 내면에 있는 ‘흑조’를 박멸할 것을 명하고, 그 결과 흑조를 얻지 못한 니나의 백조는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니나는 완벽을 추구하지만, 완벽해질 수 없다. 그것이 니나의 정신을 점점 오염시킨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완벽을 추구하면서도 완벽을 억제하는 자기 자신, 흑조를 꺼내 보일 수 없도록 통제하는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니나는 비로소 억압된 내면의 공격성과 욕망을 폭발시키며 ‘항명’하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내면의 흑조가 깨어나는 니나. *사진 : 다음 영화 <블랙 스완>(2011) 스틸
극이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부에서 니나는 어머니에게 정면으로 대적한다. 그리고 니나의 흑조는 피부를 뚫고 검은 깃털을 내보인다. 다리는 꺾이고, 한 마리 흑조가 금방이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 잉태된다.
그리고 마침내 니나는 흑조를 가두고 있던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이쁜이’의 방안에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인형들을 모두 버리고, 어머니의 이상을 좇아 그렸던 자신의 어릴 적 ‘자화상’들을 모두 뜯어내버린다.
니나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연 당일 기어코 나가 자신의 흑조를 앗아간 릴리를 발견한다. 더 정확히는, 릴리에게서 흑조를 빼앗아버린다. 니나는 전신거울을 부수고, 그 파편으로 릴리를 찌른다. 이것은 니나의 자아(거울)을 해방시키고 그 자아로 흑조를 흡수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이제 방해될 것은 없다. ‘완벽한 스완 퀸’이 되는 일이 남았을 뿐.
니나는 본 공연에서 이제껏 보지 못한 온전한 흑조를 연기해낸다. 그것은 마치 진짜 ‘흑조’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는 것처럼 생경하다. 그리고 대망의 백조 여왕의 죽음이 이뤄지는 마지막 장에 앞서 니나는 자신이 죽인 줄 알았던 릴리의 축하인사를 받는다. 어째서? 죽였던 릴리가 어째서 다시 살아나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걸까?
마침내 니나는 거울 파편으로 찌른 것은 릴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다. 완벽한 백조 여왕이 되기 위해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흑조를 연기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흑조의 본성을 억압하려드는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했다. 그렇게 흑조는 완성되고, 흑조가 완성됨으로써 백조 여왕의 순수도 완결된다.
“난 완벽했어.......”
니나는 ‘my little princess'를 연발하는 토마스 앞에서 피를 흘리며 말한다. 난 완벽했다고. 그러나 결국 그 자신을 잃는다. 백조로서 완벽했을지 모르나, 자기 자신이 죽음(이후에 실제로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알지 못한다)에 이름으로서 끝끝내 완전하지 않다.
니나의 끝이 결국 죽음의 이미지로 마무리 되는 것은 그 이상의 종착점이 니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남기 때문이리라. 어쨌거나 니나가 완벽에 가깝게 연기한 것은 극중에서 줄곧 토마스가 원한 모습이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니나는 자신의 완벽한 연기를 위해 자신을 옥죄던 굴레들을 파멸시켰다. 더 정확히는 그런 굴레에 옴짝달싹못하고 굴종하는 ‘나’조차도 부숴버린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확신을 갖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접촉하면 할수록 우리들은 손실과 위험과 혐오감을 감수할 각오를 더욱 단단히 해야 한다. (중략) 사교 집단은 으레 우리들에게 타협과 양보를 강요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자신이 섞이거나 단체나 클럽이나 모임에 가면 개인은 무력해져야하며 개성은 사라진다.
쇼펜하우어, 『인생론 』중
우리를 정의하는 것들, 타자성의 굴레들은 지금도 우리를 멋대로 정의한다. 특히 그 굴레는 ‘~니까’라는 어미로 우리를 속박시킨다. ‘너는 학생이니까’, ‘너는 직장인이니까’, ‘너는 나이가 많으니까’ 등등. 이 타자성의 굴레는 붙이려고 한다면 무한히 우리를 억압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선에 따라, ‘그런가, 나는 그러니까 할 수 없는 건가’라고 자기가 자신을 구속해버린다.
사회 속에서 이러한 굴레들을 개인이 부술 수는 없다. 이 모든 굴레들은 정교하게 조작된 사회장치의 한 부분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열망을 향할 때 그러한 굴레들을 ‘거부할 수 있는 강한 나’를 가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그 방해하는 일들에 굴종해버린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블랙 스완>은 그렇게 타자성의 표피 속에 갇혀버린 ‘나’들을 파멸시킬 것을, 그래서 진정한 나의 완벽을 얻으라고 외치고 있다.
너를 가두는 건 너다.
우리의 열망과 욕망에 솔직해지자. 그리고 우리의 긴 인생에서 나만의 흑조를 얻자. 그래서 나의 밝음도 더 밝아지도록, 진정한 나를 얻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