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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Sep 04. 2016

중심이 사라지자 내가 보였다

중심이 사라지자, 내가 보였다.

                                                                                              -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어 올리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중심의 괴로움 / 김지하

 

  

중심이 사라지자 카오스가 찾아왔다.

중심에 기대며 살던 이들이, 구심점이 사라지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심의 그늘에 가려진 것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중심이 비워지면 채워지기 마련인데, 간혹 중심을 놓기 싫은 이들이 많다. 자기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렇다. 권력에서 노는 이들이 그렇다. 중심이 비워졌다고 오랫동안 흔들리는 집단은 해체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때로 중심은 괴롭다. 자기의도와 상관없이 중심이 되버린 이들은 더 그렇다. 키리시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권력에 대한 의지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타고난 외모나 배경 혹은 실력 때문에 추종자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더 불행한 건 출생순서 때문에 가족의 맏이 되는 경우다.

나는 다행히 장남이 아니었다. 장남의 위치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서 좋았다.

자기 삶의 꼭지점이 다른데, 가족 시스템은 끊임없이 장남의 위치를 점검한다.

나는 그 가문의 CC tv 밖에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우리 집의 장남은 고군분투한다. 장남의 기준에 다다르지 못함을 무욕의 삶으로 변호하고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기도 한다. 자기 삶의 보폭을 가지기에는 장남은 쉽지 않다. 뻔뻔해지지 않고서는 어렵다.

키리시마가 그랬을까? 배구동아리의 에이스로써 그리고 반에서 아님 학교에서 잘 나가는 성골의 역할이 부담스러워 시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적을 한 걸까?

주인공이 사라진 영화.

영화정보 없이 보는 이들을 주인공이 나올 때까지 학수고대하는 영화.

언제까지 나오나 보자 오기로 버티게 하는 영화.

모더니즘이 중심을 구심점으로 조화롭게 돌아간 세상이었다면, 그래서 고전영화 방식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운행되었다면, 후기 모더니즘은 이 중심을 일부러 배제한다. 혹은 중심이 사라진 세계를 즐겨 다룬다.

-참고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의 영화에서는 주인공급의 여배우가 30분 정도 나오다가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영화 제목이 ‘실종’은 아니다. ‘정사’다

그리고 그 중심이 서서히 분배되고 개별화 된다. 모두가 중심이 된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매력은 중심에 가려진 이들을 섬세히 묘사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학교도 사회처럼 엄연히 계층이 존재한다. 계급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겁다.

공부와 외모가 출중한 성골과 1% 모자라지만 그럭 저럭 성골의 총애를 받는 진골, 그리고 존재감 없는 그밖의 그룹.

이들에겐 중심이 사라지건 말건 상관없다.

존재의 중심에서 밀려났으니 중심과 상관없이 논다. 그들에겐 키리시마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고 영화 동아리 교사의 시나리오를 배반하고 신속하게 좀비영화를 찍는 게 급선무다.

그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좀비’는 이들의 페르소나다.

그렇다고 이들이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고 초연하게 자기의 신념대로 살고 가는 친구들은 아니다. 어쩌면 낙오자로 인정하고 그래서 권력에 대한 욕망을 차단해 버리고 미리 게토가 된 건 아닐까?

가령 동남아 국가를 향해 행복지수 1위라고 떠드는 미디어의 기만은 가난해도 괜찮아라고 영혼없는 위로를 하는 거 같아 불쾌하다.

그들이 욕망을 포기해서 그렇지 욕망이 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우리가 겪었던 물신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삶의 속도의 완급을 조절 할 때마다 들이대는 필리핀 어부의 우화는 그만 떠들자.

키리시마가 가끔씩 중심에서 사라지는 게 좋다. 성장기에는 어딘가에 기대면서 자라지만 그 버팀목이 고정관념이 되고 성격이 되어버리면 오히려 독이 된다.

하지만 경쟁의 시스템으로 인해 일찍부터 계층이 형성되고 성인이 되어서는 공생을 거부하는 계급이 된다.

아파트 평수로 구획정리 되는 초등교실의 비극을 보시라!

영화 동아리장 마에다가 진골 출신 카즈미와 잠깐 로맨스에 빠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 계층의 벽을 넘지 못했다. 벽을 넘는 건 계급에 편입되는 일밖에 없다.

키리시마가 사라진 4박 5일간의 균열을 기록한 영화.

틈은 혼란의 증거가 아니라 부화의 증거다.

틈이 벌어지는 순간에,

카즈미는 독설을 날리는 친구의 뺨을 때리고 히로키는 카메라를 불안하게 응시한다. 그리고 키리시마는 태업을 선언했다.

누구나 부화를 맞이하는 순간 균열이 오게 마련이다.

틈이 벌어지는 순간의 진통은 잘 정리되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키리시마, 지금처럼 떠나 있어도 괜찮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그대 부디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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