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다 피기 전에 꽃이 진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눅눅한 구름들이 공중에서 미적거렸고
갓 나온 새순들은 빗방울의 따귀를 견뎌야했다.
그리고
질척한 꽃잎들은
마을 놀이터
아파트 베란다
공원 의자
학교 운동장에 오랫동안
주둔해 있었다.
2년 전 나는 TV를 볼 수 없었다.
무성의한 방송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열흘 내내 공포영화를 틀어 주었다.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내가
공포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될 때는
귀와 눈을 가리는 전략을 취한다.
이런 전략이 없었다면
나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영원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제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다가
세월호를 잠시 짚어주는 대목에서 '잠시 멈춤' 상태가 되었다.
슬픔과 비극이 이미 내장 되어 있는 대상에는 가까이 가기 어렵다.
슬픔을 유보하거나 외면하는 전략은 아니다.
비극이나 슬픔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대상을 보게 될 때는 뜨거움 때문에 바로 보기 힘들다.
그래서 권력과 충돌하는 시위장면을 보면 무조건 반사처럼 눈물이 솟구친다.
2년 전 대안교육 악법 반대 투쟁을 위해 세종시 교육부 청사에 갔을 때도
메슥거리는 슬픔 때문에 힘들었다.
개인적으로 공포 영화를 싫어하는 까닭은 개연성이 빠진 공포 조싱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공포를 조성하지 않아도 현실에선 맘만 먹으면 공포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공포 영화를 만든 공모자들은 대단한 흥행에도 불구하고 공을 떠넘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나는 '악마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