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책] 루이지 기리의 사진수업

Luigi Ghirri Lezioni di fotografia

by 피운

[루이지 기리의 사진수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필립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처럼 강의를 정리한 책이란 점과, 다른 하나는 그의 사진에 이끌렸습니다. 필립퍼키스는 40여 년간의 강의를 직접 챕터별로 정리해서 그의 통찰을 '사진강의 노트'로 엮었습니다. 루이지 기리의 사진수업은 그의 녹음본을 사진가이자 사진이론 및 역사 연구자인 파올로 바르바로 와 줄리오 비차리란 두 인물이 엮었습니다. 1989년 1월에서 1990년 6월 사이에 이탈리아 레조 에밀리아 (Reffio Emilia)의 프로제토대학교(Universita del Progetto)에서 진행한 강의내용입니다. [필립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는 40여 년간의 사진강의를 통해 얻은 한 사진가의 통찰을 경험할 수 있다면, [루이지 기리의 사진수업]에선 20세기 후반부 사진교육의 단면과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출처] https://fotocomefare.com/luigi-ghirri/
[사진출처] https://www.bulgarihotels.com/ko_KR/tokyo
사실 사진은 어떤 정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23p.

롤랑바르트, 보들레드 등이 사진에 관해 언급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사진은 어떤 정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루이지 기리가 뜻하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먹지는 못했지만, 이 문장에서 한참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약간의 배움과 경험으로 상업사진을 교육하면서, 간혹은 더 깊은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취미사진을 수강생들과 함께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껏 저는 '자기만의 Definition(정의)을 찾으세요'라고 안내했습니다.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찾아보자는 의미였죠. 저 또한 나름의 정의를 세워보고 갈아치우면서 사진을 해왔습니다. 때론 누군가 '사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보면 멋진 답을 하려고 준비해두고 있었고, 그럴듯하게 답변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 그런데! 사진에 정말 무슨 정의가 필요할까요! 어차피 어떤 개념적인 말로 설명할 재간이 없다는 건 명백한데, 굳이 말로 사진의 의미를 정의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무모합니다. 저는 그걸 교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진이 무엇인가요?라고 누군가 물으면, 앞으론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글쎄요~'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세계의 한 부분을 바라보고 나머지를 지웁니다. 25p

맞아요. 지우고 싶지 않아도 우리는 사각의 프레임 밖을 담을 방법이 없습니다. 사진은 무엇을 담을지를 선택함과 동시에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끊임없이 선택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뺄셈의 미학이라고 누군가 멋지게 말했나 봅니다. 욕심을 부려 다 담고 싶어, 광각렌즈를 활용하기도 하고 더 멀리 더 멀리 뒤로 가서 촬영하기도 합니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랜드마크를 다 담아내려 애쓰죠. 그럴수록 우리의 존재는 작아지고 희미해집니다. 나의 존재가 분명해질수록 우리는 버려야 하는 것들이 생깁니다.


그럼 사각의 틀 밖의 세상은 어떻게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요?

루이지기리는 사진은 답이 없는 수수께끼 같은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실상 사진은 내가 본 것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내가 본 것의 재해석입니다. 27p

철학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세상을 보면서 살아가죠. 나만의 해석으로 만들어진 세상이고 우린 그걸 사진으로 찍습니다. 표상을 이미지로 기록한 것입니다. 세상의 한 부분만을 담아낸 표상은 눈으로 본 세상과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고, 다른 이에겐 전혀 다른 세상을 상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재현의 연속인 셈이죠. 사진 전시회에 가는 것은 작가가 발췌한 세상 위에 나만의 세상을 표상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작품을 다시 카메라로 찍는 행위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루이지 기리의 작품 중에도 그러한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lampoonmagazine.com/luigi-ghirri-fotografia-silenzio-nostalgia-scatti/
[출처] https://matthewmarks.com/
[출처] https://matthewmarks.com/
투명성 141p

처음 생각해 본 키워드였습니다. 루이지 기리의 '투명성'에 관한 수업이 인상적입니다. 각막의 투명성, 유리창문의 투명성, 공기의 투명성.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투명한 정도의 차이를 보게 되는 것이고, 투명성과의 싸움인 것처럼 보이네요. 이런 식의 관점은 처음입니다. 카메라 렌즈의 투명성과 안개의 투명성 등 낸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투명성에 곱으로 작용하는 우연성. 확률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우연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는게겠죠!? 오늘 바라보는 세상이 나에게 어떤 표상으로 그려지는 것은 투명도의 확률일 수도 있겠군요.


사진은 본질상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첫째, 이미지 내부에 무엇을 포함할지 이해해야 하죠. 촬영의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둘째, 빛, 공간, 시간과의 관계를 통해 완성된 외부세계의 한 조각에 소통 가능한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166p

루이지 기리가 말한 "소통 가능한 가치"를 저는 '힌트'라고 말합니다. 사진 밖의 세상을 프레임 안에 담아낼 유일한 방법은 힌트를 담는 것입니다. 그의 말로 하면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루이지 기리가 말한 빛, 공간, 시간과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사각 틀 밖의 세상 이야기를 틀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그 공간에 한동안 머물며 빛을 바라보고 느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각에만 의존한 프레이밍은 공간 속에서 온몸으로 느낀 감정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작은 나뭇잎 한 장을 찍었을 뿐인데, 나에겐 풍경사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진촬영은 선택과 가치부여의 과정인가 봅니다. 무엇을 촬영할지를 선택하기 위해선 눈의 정보만으로 쉽게 판단하기보다는 잠시 머물러 보겠습니다. 그때 내 마음이 동하는 것을 찰칵! 해보면 어떨까요?


사진을 찍고 싶을 때마다 기술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말이죠.
가능하면 기술은 단순히 사용하길 권합니다.

루이지 기리의 사진수업은 1989년~1990년대의 사진교육 내용입니다. 디지털이 상업적으로 상용화되기 전인 2007년~2008년 대 까지는 그의 교육내용은 유효합니다. 저 역시 그런 교육을 받았고, 루이지 기리의 사진수업은 저를 다시 학생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상용화 이후 약 20년이 지난 지금의 사진에선 유통기한이 다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사진의 기술적인 교육 내용이 그렇습니다. 역사적 가치는 있지만, 기술적 원리로써도 이미 고전입니다. 하지만 그는 당시에도 기술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사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능하면 기술을 단순히 사용하길 권하고 있습니다.

사진학교에서 사진공부를 처음시작했을 때, 기술적인 원리이해도 부족했고, 조작도 서툴렀던 그때, 저는 아는 것이 없었기에 대상에만 집중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사진들은 한 컷, 한 컷, 틀 밖의 공간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 기술적인 능력치가 올라갈수록 촬영 결과물을 예상하게 되고, "지금은 찍기엔 빛이 충분하지 않아~", "렌즈가 아쉬워~", "ND필터를 구매해야겠어", "흑백사진을 위해 색필터도 꼭 필요할 것 같아", 등, 정작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고민은 뒷전이고, 핑계만 늘어갔습니다. 사진을 잘 찍고 싶어서 배운 기술이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었습니다.

루이지 기리는 디지털 사진 세상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AI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술적인 부분에 방해받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데만 집중할 디지털 세상을 그린 것 같습니다. AI는 기술적인 조작법을 익히고 숙련하는 시간을 단축시켜주고 있습니다. 촬영할 때 내가 원하는 곳만 바라보면 됩니다. 마치 장비를 잘 이해하는 것이 사진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고도화되었지만, 기술에 방해받지 않고 진짜 사진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다가왔습니다. AI는 많은 사진가를 대체하겠지만, 진짜 사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외부세계를 지워 나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192p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고 결국 남아 있는 세상을 카메라로 담아내면, 난 그것이 논리 밖 이성이 통하지 않는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난 그것을 '틈'이라고 말합니다. '틈'을 찍기 위해 세상을 지워나갑니다. 그 연결통로인 '틈'을 찾는 이유는 가공된 문명화된 세상에서 벗어나 진짜 자연이 존재함을 증명하고 그곳으로 넘어가고 싶어서입니다. '틈'을 찾아내는 작업으로 사진을 선택한 이유는 멈추어야 보이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흐름 속에선 논리적인 나의 이성은 그 물결에 쉽게 휩쓸립니다. 내가 놓친 그 틈을 카메라가 담아주길 바라면서 셔터를 누릅니다.


보여야 하는 영역과 모든 것을 전부 보일 필요가 없는 영역 사이의 상호 교류에 관심이 있습니다. 195p
보여햐 할 것 과 보이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좋아합니다. 196p
강조해야 할 대상이 있을 때는 주로 빛을 사용합니다. 아니면 배경이 잘 보이지 않는 날의 분위기를 활용하곤 합니다. 197p

루이지 기리는 프레이밍으로 지우고 남은 세상을 다시 한번 지웁니다. 프레이밍으로 강제적으로 지워냈다면, 이젠 시선의 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빛의 밝고 어둠으로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적정 노출로 밝혀서 많은 정보를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틀 밖으로 밀어내기엔 조연 역할로 가치가 있는 대상엔 인색한 빛으로 사각 틀 안에 머물 것을 허락합니다.


저는 배경을 흐리는 방식으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시각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그런 사진에서 약간의 경박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198p
심도의 가치를 부여할 인공적이지 않은 방식을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전경에 위치한 무대적인 장치를 활용해서도 심도를 줄 수 있습니다. 199p

루이지 기리는 조연들을 뿌옇게 아웃포커싱 하지 않습니다. 무척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깊은 심도의 촬영을 선호합니다. 배경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들어서 주인공임을 드러내는 작업은 보는 이들에게 주인공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여서 싫고, 정답이 있는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아 곧 흥미를 잃게 됩니다. 심도를 조절하는 방법이 단순히 배경의 흐림 정도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63p

사진에 대한 기리의 근본적인 생각은 감정의 투영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책/전시] 노탄 Not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