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히어로들의 영원한 고향

비오의 브랜드텔링 24. | 나라경제 2020년 12월호

by 비오

1929년 뉴욕엔 주가 시장의 대폭락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엄습해왔다. 이름하여 ‘검은 목요일’을 시작으로 뉴욕에선 활기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경제적 어려움을 감당해야만 했고 모두가 힘든 상황에 누구 하나 기댈 곳 없는 암울한 1930년대 뉴욕에 한줄기 빛을 선사한 것은 펜촉 끝에서 창조된 슈퍼맨이라는 슈퍼 히어로였다. 새로운 스타일의 만화잡지 ‘액션 코믹스 1호’에 담긴 슈퍼맨의 활약은 어려운 이들에게 위안이 되었고 소설 등을 펴내고 있던 출판사들은 저마다 코믹스 부서를 만들고 새로운 슈퍼 히어로들을 쏟아냈다. 이른바 ‘코믹스 골든 에이지’의 시작이었다.

뉴욕 거리 가판대에 소설 잡지를 출간해 판매하고 있던 뉴스스탠드 출판사 마틴 굿맨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화 전문 출판사 ‘타임리 코믹스’를 설립한다. 그는 프리랜서 만화작가 회사 퍼니스 주식회사와 협업해 휴먼 토치와 서브 마리너라는 새로운 히어로를 만들고, 자신이 출간한 공상과학 소설 잡지 ‘마블 사이언스 스토리’의 이름을 따와 1939년 ‘마블 코믹스 1호’를 출간했다. 그리고, ‘마블 코믹스 1호’는 성공을 거둔다. 놀라움을 의미하는 ‘마블’이라는 단어가 경이롭고 놀라운 힘을 갖은 슈퍼 히어로들의 상징이 되는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나의 친구 슈퍼 히어로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마블 코믹스는 첫 편집자 조 사이먼과 잭 커비의 협업으로 자유와 정의, 애국의 상징인 ‘캡틴 아메리카’라는 영웅을 창조해냈다. 깡마르고 병약해 군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애국심 투철한 청년이 군대의 실험에 의해 후천적 능력이 주어진 후 온몸에 성조기를 두른 듯한 복장을 입고 독일의 히틀러를 물리치는 모습을 보고 마치 자신이 해낸 것처럼 사람들은 기뻐했다.

1956년 조 사이먼에 뒤를 이어 두 번째 편집자가 된 스탠 리도 보통의 가족이 감마선을 맞고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슈퍼 히어로 팀 ‘판타스틱 4’를 만들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이 후천적 힘에 의해 악당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며 감정이입이 된 사람들은 판타스틱 4를 자신의 가족인 양 받아들였다. 이로써 마블의 슈퍼 히어로들은 보통의 사람이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큰 능력을 얻게 되는 이야기를 통해 마치 슈퍼 히어로가 나의 이웃으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판타스틱 4의 팬들은 스탠 리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스탠 리는 이에 화답하듯 이때부터 잡지의 맨 뒷면에 마블의 히어로 탄생과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칼럼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며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나갔다.

1962년엔 현명하고 올바르고 정의로워야 만 하는 슈퍼 히어로의 룰을 깨고 괴물 헐크를 슈퍼 히어로에 등장시키는가 하면 생활고에 허덕이는 10대 고아 소년이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맨으로 변모하는 슈퍼 히어로를 만들었다. 북유럽 신화에서 천둥의 신 토르를 현시대의 히어로로 등장시키고, 돈만 알던 무기 사업가가 자신의 무기로 위험에 빠지면서 등장하게 된 아이언 맨 등 마블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탄생 스토리를 가진 히어로 들을 쏟아내며 만년 1위 자리에 있을 것만 같던 DC 코믹스를 제치고 ‘마블’이란 이름 아래 모인 히어로 군단을 1위로 올린다.

차별화란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치를 느낄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마블의 차별화는 내 손에 닿을 것만 같은 히어로를 등장시켜 그들이 마치 내 이웃에서 혹은 가까이에서 나를 도와줄 것만 같고 어쩌면 그들과 대화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이 현실로 끌어왔다. 펜촉 끝에서 탄생했지만 살아있을 것만 같은 그들은 나의 친구이자 가족 아니었겠는가.



그들이 사는 세상

짧은 시간에 다양하고 다채로운 슈퍼 히어로를 쏟아 낸 스탠 리의 능력은 마블 작법(Marvel Method)이란 방법에서 비롯됐다. 마블 작법은 스탠 리가 생각한 스토리를 만화 작가에게 처음과 끝부분만 들려주고 중간 부분은 만화 작가가 스스로 채워 만드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로써 마블 히어로의 정체성을 연결하면서도 다채로운 스토리로 만들어졌고 마블은 숙련된 만화작가를 배출하는 만화 사관학교가 되어갔다.

스탠 리는 또한 수많은 작가들 손에서 탄생한 마블의 모든 슈퍼 히어로들이 각기 다른 히어로 스토리에 서로 등장해 도움을 주기도 하고 카메오로 잠깐 얼굴만 비추는 식으로 그들이 사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고 공유하는 마블 세계관(Marvel Universe)을 만들었다. 한 마디로 슈퍼 히어로들이 살아 숨 쉬는 또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히어로들이 갈등하고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각자의 능력을 모아 함께 악을 응징하고 갈등을 해소했다.

마블의 세계는 1989년 ‘마블 필름’이 설립되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TV에 방영되면서 만화 잡지의 스토리를 시대에 맞게 만들어 마블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 2008년부터는 아이언 맨을 시작으로 CG를 적용한 실사 영화로 제작해 전 세계를 마블의 세계관으로 덮어 가고 있다.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그 가치는 서로 다른 시대와 동떨어진 공간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전달된다. 태초에 브랜드를 만든 이가 내는 목소리가 가치가 있다면 만든 이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어느 시대라도 그 목소리는 살아있고 어떤 공간에라도 전달된다는 말이다. 브랜드를 만들 때 사람을 향한 자신의 신념과 생각을 브랜드의 목소리에 담아야 하는 이유다.

2018년 11월 12일에 스탠 리는 사라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마블 시리즈를 통해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다.




•한국경제신문, 밥 배철러 지음, 송근아 옮김, 더 마블 맨, 2017.

•시공사, 마크 웨이드 지음, 이규원 옮김, 히스토리 오브 더 마블 유니버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