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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오 Sep 16. 201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별이 빛나는 들판의 수호성인 야고보

Let the sun
guide you
태양을 따르라 안내할 것이다. 


별이 빛났던 들판을 찾은 수많은 이들에 의해 1200여 년 동안 까미노(길)는 다져지고 마을은 영글었다. 

그 들판에서 별은 왜 그리 빛을 냈을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오랜 세월 그곳으로 향했을까?

모든 의문의 답은 그곳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동생 요한과 그물을 수선하고 있던 야고보(히브리어: יעקב, 라틴어: Iacobus)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라는 말씀을 듣고 그물도 가업도 모두 던지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야고보는 내로라하는 부잣집 제베대오 집안 장남이었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고생을 자청한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만 바라보고 온 야고보를 예수께서는 더욱 아끼셨다. 하지만, 그분께서 군인들에게 끌려가셨을 때 야고보는 겁이 나 달아났다. 자신의 목숨만큼은 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야고보는 말씀에 더 절대적이었다.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하시고 하늘로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며 야고보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태양이 지는 땅끝까지 가기로…


배를 타고 안달루시아 지역에 상륙했고 로마길(Roman road)을 걸어 메리다(Mérida), 코임브라(Coimbra), 브라가(Braga)를 거쳐 태양이 지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베리아 반도에 와서 처음으로 설교한 곳은 대서양으로 흐르는 강이 있는 이리아 플라비아(Iria Flavia, 현 빠드론 padrón)이다. 이후 땅끝 피니스테레(Finisterre)와 근처 묵시아(Muxía)의 작은 마을까지 이베리아 반도 서북쪽 지역을 돌며 말씀을 전했다. 야고보는 헤로데(Herodes Agrippas I)에게 속아서 팔려가거나 그에 대항해서 독립운동을 하던 유대인 거류민을 기도로 위로하고 그분을 증언하여 믿음을 주고 싶었다.  

야고보는 땅끝까지 쫓겨 온 유대인들의 절박했던 마음을 위로하며 달랬고 그들의 사연을 귀담아들었다. 

야고보의 흔적

예루살렘의 헤로데 왕은 야고보가 돌아와 자신의 치부와 만행을 들춰낼 것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그러던 중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돌아왔다는 풍문이 들렸다. 헤로데는 야고보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체포된 야고보가 나라를 어지럽히며 역모를 꾸미려 한다며 참수한다. AD 44년의 일이다. 

야고보의 제자 테오도로(Teodoro)와 아타나시오(Atanasio)는 스승을 이대로 둘 수 없었다. 헤로데는 분명 시신도 해하려 할 것이다. 그런 참담한 일을 당하기 전에 시신을 빨리 모셔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야음을 틈타 시신을 수습해 무작정 야파(Jaffa)로 향했다. 야파의 포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특별해 보이는 배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돌로 만들어진 데다 노와 방향타가 없는 배였다. 무엇엔가 이끌리듯 배에 시신을 실자마자 배는 해안을 스르르 빠져나와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어느새인가 천사가 나타나 그들의 배를 이끌어주고 있었다. 

출발 후 7일째 되는 날 배는 육지에 도착했다. 배가 도착한 곳도 야고보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초로 설교했던 그곳 이리아 플라비아였다.  


또 다른 설화에선 폭풍우가 치는 어느 날 해안으로 밀려온 배에서 가리비 껍데기에 둘러싸인 야고보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이리아 플라비아 어부의 이야기도 전해온다. 가리비가 까미노의 상징이자 야고보 상징의 근거가 된 다른 하나의 설화이다. 오늘날 가리비를 프랑스에서는 Coquille Saint-Jacques(야고보의 조개)라 부르는 것도 전설과 기록, 설화들이 얽히고설켜 사람들의 생활 속에 파고든 것일 거다. 

하지만 스페인의 빠드론시(예전 이리아 플라비아) 문장(Coat of Arms)에는 전자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문장에서는 돌배에 타고 있는 두 명의 제자가 야고보를 향해 기도하고 있고 돛없는 배에 방향타는 천사가 잡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리아 플라비아 문장

이리아 플라비아에 도착한 두 제자에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전설과 신화와 마법의 세계가 뒤섞여 있다.

제자들은 그 지역을 통치하던 루파(Lupa) 여왕을 찾아갔다. ‘암늑대’라 불리는 루파 여왕은 이방인들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루파 여왕은 만일 장사 지내길 원한다면 스페인의 왕이라 불리는 사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말했다. 사실 그 왕은 잔인하고 배신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왕을 찾은 제자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허락을 구했다. 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제자들을 죄인이라며 감옥에 가두었다. 제자들은 낯선 땅에서 당하는 이 모든 일이 두렵고 암담했다. 많은 날을 야고보 스승과 함께하며 이런 때 기도로 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다. 무릎 꿇고 경건히 기도드리고 있는데 감옥의 문이 스윽 열렸다. 감옥 문을 연 건 천사였다. 

제자들은 다시 서둘러 왔던 길로 돌아갔다.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데 뒤에서 철갑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탈출을 눈치챈 왕이 보낸 기사들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간발의 차로 뒤쫓아오고 있었다. 전력으로 뛰어 다리를 막 건넜을 때 뒤에서 천둥 치듯 큰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그 튼튼하던 다리가 꿀렁거리더니 한순간에 무너져 뒤쫓던 기사들과 함께 강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제자들과 왕 모두 이 광경을 지켜보며 아연실색했다. 왕은 제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신성한 힘이 있음을 직감하고 자신이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자들은 돌아가 왕의 잘못을 꾸짖고 스승이 생전에 그러했듯이 세례로 모든 죄를 사하여 주었다. 

루파 여왕에게 돌아온 제자들은 못된 의도를 알았음에도 성인을 위해 영묘터를 부탁했다. 여왕은 산에 소를 모아 놨으니 소를 골라 수레차를 끌게 해 소가 멈춘 곳에 영묘를 세우라 말했다. 제자들은 여왕의 의도를 의심했지만, 스승을 잘 모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여왕의 말을 따랐다. 

산으로 올라가 여왕이 말해 준 곳에 거의 다다랐을 때 시뻘건 불을 뿜으며 용 한 마리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제자들은 여러 일을 겪은 터라 당황하지 않았다. 앞에 있는 나뭇가지 두 개를 꺾어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용에게 보였다. 십자가를 본 용은 불 뿜는 것을 멈추고 양처럼 순해져 제자들 발치에 앉았다. 제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소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갔다. 예상했던 대로 얌전한 소들은 아니었다. 성질 사나운 야생의 들소였다. 콧바람을 푹푹 내더니 뿔을 들어 제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용에게 보였던 나뭇가지 십자가를 보여주었다. 무섭게 돌진하던 소들도 갑자기 자리에 서더니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며 제자들 곁으로 왔다. 수레를 소에 걸고 시신을 모신 제자들은 루파 여왕의 궁전으로 향했다. 

제자들이 용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 생각했던 루파 여왕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여왕은 제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세례를 받았다. 여왕은 궁전을 야고보의 영묘로 써달라 애원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제자들은 영묘터는 하늘이 정해주실 것이니 수레를 끄는 소가 멈추는 그곳을  영묘터로 정하겠다 답했다. 

수레가 멈춘 곳은 Liberdvnvm(Libredón) 숲에 있는 Arcis Marmoricis 들판이었다. 

루파 여왕은 이곳에 야고보의 무덤을 만들어 봉헌했고 제자들은 장례의 마지막에 대리석 석관에 유품과 함께 야고보를 안장했다. 제자들과 여왕은 그 위에 제단과 작은 예배당을 지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제자들은 하늘의 뜻을 전했던 소가 있었던 산을 Pico Sacro (신성한 산)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야고보의 영묘는 이후 800여 년 동안 자취를 감추고 침묵한다.

은둔자 펠라요(Pelayo)는 무어인들을 피해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위해 묵상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묵상하면 더 많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더 많은 소리가 들리는 법. 하지만 어느 순간 신비한 선율이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눈을 뜬 펠라요는 귀 기울여 들으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선율이 들려오는 들판에서 별 하나가 엄청난 광채를 내고 있었다. 어느새 발걸음은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거의 다다랐을 때 펠라요는 별빛이 한 곳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펠라요는 전력을 다해 내 달렸다. 이리아 플라비아 주교 테오도미르(Theodomir)에게 달려간 펠라요는 이 기묘한 광경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주교는 신성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몇 사람을 데리고 펠라요가 말한 곳으로 황급히 갔다. 펠라요가 말했던 곳에 가까워질수록 신비한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별빛이 내리는 곳에 온 주교는 사람들을 시켜 덤불을 걷어내란 말을 하고 계속해서 기도했다. 어떤 뜻인지 묻고자 함이었다. 울창한 덤불을 다 걷어내고 나니 언덕 밑으로 작은 신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전으로 내려간 주교는 아치 밑에 돌로 만든 석관 하나를 보았다. 분명 부근 어딘가에 묘의 주인을 설명하는 표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주교는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어두워서 바닥을 더듬으며 찾는데 손끝에 부드러운 것이 턱 하니 걸렸다. 양피지와 파피루스 뭉치였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양피지를 펼쳐 내용을 읽은 주교는 순간 세상이 멈추는 듯했다. 

빛이 내려앉은 이 석관의 주인은 다름 아닌 사도 야고보였다. 갈리시아에서 800여 년 동안 전해오던 전설이 깨어난 순간이었다. 813년의 일이다.

테오도미르 주교는 야고보 영묘의 발견은 무어인에게 고통받는 이베리아 반도를 깨울 것이라 직감했다. 주교는 별빛 들판에 대한 소식을 아스투리아스 왕 알폰소 2세(Alfonso II)에게 전했다.

알폰소 2세는 무덤이 발견된 곳에 돌과 진흙으로 만든 겸손한 교회를 세우고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한다. 

교회 주변에는 세례당과 수녀원을 세우고 적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강건한 벽을 세워 도시를 만들었다. 

왕은 그곳의 이름을 명명한다. 빛나는 별을 보고 야고보 성인을 발견한 그 도시의 이름은 

 

Santiago de Compostela
별이 빛나는 들판의 야고보 성인
Santiago - 성인(Sant) + 이아고(Iago) 
Compostela - 들판(Campus) + 별(Stella)
이름으로 알 수 있는 명칭 조어 순서는 다음과 같이 유추된다. 
첫 번째, 로마의 속주였던 스페인은 라틴어를 차용해 변형된 단어가 많다. 
(예) 이아코부스(라.Iacobus) > 이아고(Iago), 별(라, Stella) > Stela
점차 두 개로 이루어진 단어는 하나의 단어로 변형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자는 레콘키스타(Reconquista 711~1492)가 한창이던 813년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발견되고 신화 같은 이야기가 퍼진 건 우연이라면 정말 기가 막힌 우연 아니겠는가? 진위야 어찌 되었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련의 일들을 계기로 야고보 성인은 레콩키스타의 우상이 된다. 이베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야고보의 시신이 같은 땅에 있다는 것만으로 무어인들에게 대항할 힘을 얻었다. 

야고보 성인이 모습을 드러낸 첫 번째 기적은 845년 라미로 1세 (Ramiro I) 통치 기간에 일어난 클라비호(Clavijo)의 전투였다. 알벨다(Albelda) 근처에서 일어난 교전에서 수적인 열세로 패배한 아스투리아스(Asturias) 군사들이 후퇴하여 클라비호 산으로 피신해 있었다. 무어 군사가 추격해 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라미로 왕은 야고보 성인이 나타나 승리를 약속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 아침 라미로 왕은 야고보 성인의 약속을 믿고 기습을 감행한다. 군사들의 함성과 비명이 뒤엉키고 있을 때 갑자기 하얀 말을 탄 야고보 사도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빨간색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하얀 깃발을 다른 손에는 번개 칼을 쥔 야고보 성인은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며 혼자 6만 명의 무어인을 쓰러뜨렸다. 이 전투를 계기로 야고보 성인은 전사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 불린다.

Codex Calixtinus에 묘사된 Santiago Matamoros

레콘키스타 동안 전사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 활약은 이슬람 침략자들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는 단결의 원동력이 되었고 무어 군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되었다.  

산티아고의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 더 많은 기사가 몰려왔고 성인의 무덤을 보기 위해 별을 따라 걷는 사람도 늘어나 까미노와 마을들은 더욱 견고해지고 커졌다. 겸손하게 지어진 교회는 점점 커져 지금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대성당의 중앙에는 전사로서의 산티아고가 아닌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와 그들을 개종시키며 지팡이에 기대어 걸었던 자애로운 모습으로 광장에 도착한 순례자를 바라보고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과 대성당 중앙의 산티아고 석상

1200여 년간 태양이 지는 방향으로 까미노를 걸으며 고통과 기적을 경험하고 우여곡절 끝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광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복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는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까미노를 경험하지도 않았는데 공감했더랬다. 그 먼 거리를 걷고 그 고생을 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겠느냐며…

광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덤덤했다. 

“이제 다 왔다.”하며 그저 목표를 세우고 성취한 느낌 이상은 들지 않았다.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들과 원 없이 사진을 찍었다. 대성당의 한쪽은 공사로 가려져 반쪽짜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개운치 않은 기분을 뒤로하고 순례를 완성했다는 인증서를 받기 위해 순례자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서 매고 온 백팩을 내려놓은 그때의 느낌은 지금도 지울 수 없다. 가방을 내려놓는다기보다는 몸에서 무엇 하나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때 사무실 옆쪽에 작은 예배당이 보였다. 길을 걸으며 마을의 성당마다 문이 열려있으면 들어가서 무릎 꿇고 기도했던 터라 본능적으로 들어가서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가슴속에서 흐르는 눈물인 것처럼 가슴을 짜내는 통증이 느껴졌다.  


멈출 수 없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인증서를 받고 사무실을 나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예배당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힘들었던 건가? 아니 그리 힘들지 않았다. 외로워서인가? 아니 함께 걸었던 멋진 친구들이 옆에 있었다. 

반복적으로 되뇌며 이유를 찾으려 해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답을 알 수 없을 때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다. 처음부터 다시 짚어보는 거다. 

이 길을 걷기 위한 처음.

생장 피에드포르
St.Jean-Pied-de-Port    

내 생각은 그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문장

Santiago de Compostela Coat of Arms

좌측 

- 갈리시아주에 포함되어 갈리시아 문장 표시

우측

- 대성당 지하의 산티아고의 은으로 된 관 

- 산티아고를 찾을 때 빛났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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