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공학이 이끈 인생의 궤적
학부 총 동문회장을 맡고 있는 동기로부터 연락이 왔다.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백서를 만드는데 학번 별로 회고록을 넣기로 했다면서 내게 부탁한다는 것이다. 동기들 사이에 내가 요즘 글발이 좀 된다는 얘기가 있다면서.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영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솔직하게 쓰자는 마음으로 완성해서 보냈다. 글을 보면 알겠지만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이런 기회가 내게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 이유는 아래 나의 졸필을 보면 알 수 있다.
90학번 회고록
중학교 2학년 시절, 신문에 실린 유전공학 특집 기사를 접하면서 나의 인생은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당뇨병 환자를 위한 인슐린을 얻기 위해 소 15마리를 희생시켜야 했던 시대에서, 대장균에 인슐린 유전자를 넣어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신세계의 문을 연 기술, 유전공학.
그때부터 나는 유전공학도가 되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진짜 유전공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고등학교와 재수 생활 동안 억눌렸던 자유에 대한 갈망이 폭발하듯, 입학 후 1, 2학년 시절은 술과 동아리 활동에 열중하며 보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과목과 실험은 이름만큼의 매력을 주지 못했고, 유전공학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대학에 들어와 보니,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준비된 동기들이 많다는 사실에 적잖이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학과 생활보다는 바깥 활동에 마음이 쏠렸고, 그런 방황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방황은 오히려 나 자신에게 가장 강력한 채찍이 되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늦게나마 전공 공부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방황하던 중 군 입대를 하게 되었고, 제대 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미래였다. 형편없는 학점을 끌어올리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막차를 타고 귀가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마지막 학기에는 무려 21학점을 이수하며, 가까스로 8학기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어린 시절 품었던 유전공학도의 꿈을 다시 가슴에 품고, 학부 시절의 부족함을 채워나갔다.
사실 1, 2학년을 거의 통째로 날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절, 뒤처진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참 많은 질문을 하며 동기들을 괴롭혔던 기억이 난다. 그때마다 한 번도 귀찮아하거나 싫은 내색 없이 친절하게 가르쳐주던 동기들 덕분에 내가 지금 여기에 이를 수 있었다. 나의 수많은 질문에 늘 성심껏 답해주며, 나에게 공부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주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이 자리를 빌려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 따뜻한 손길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실로 석·박사를 마치고, 지금은 대기업 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돌이켜보면, 학부 시절 방황하던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격려해 준 우리 90학번 동기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제 50대 중반을 지나 인생의 후반전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편엔 ‘유전공학’이란 단어가 타오르고 있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준 모교 유전공학과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앞으로도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는 동문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내 몫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이런 소중한 회고의 기회를 준 동문회장이자 동기인 조남혁 교수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 시절의 우정과 따뜻한 연결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다시금 새기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