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백수생활

신언서판으로 단련하다.

by white finger


11월의 첫 날이다.

언제나 첫 날은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과 목표를 세우고 점검하고자 하는 조바심이 앞서는 날이었다.

하지만 지금, 슬기로운 백수는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세상의 속도로 살아내는 것보다 주어진 삶에 진정한 방향을 세우는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하루의 시작을 가로막는 어둠이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시간에 또 길을 나선다.

콘크리트에 갇혀 살 운명을 거부하고 킬리만자로의 눈처럼 살고 싶은

고결한 작은 호랑이의 깊은 꿈을 방해하고

한낱 인간에게 버림받은 도둑 고양이 취급한 행인의 무례함이

두 눈을 부라리며 쏟아내는 호랑이를 꿈꾼 고양이의 기운에 눌러 혼비백산 흩어졌다.


동이 트는 새벽의 웅장한 기운과 고양이의 앙칼진 기세에 모양새 빠진

한 인간이 걷고 걸으며 미묘한 생각의 끈이 뫼비우스 띠처럼 몸은 멈추고자 했으나

마음은 끊임없이 내달리며 곤두박질을 치는 아득한 시간이 어둠이 완전히 물러서고 나서야

시작한 그 자리로 되돌아왔다.


새벽, 넓은 숲길을 걷는 호랑이 같은 기세의 고양이가 바라 본 행인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그 옛날, 비록 호랑이로 태어났지만 인간에게 오랫동안 길들어져 퇴화된 지금, 꿈만 호랑이로 살아가는

새벽 고양이의 기백에 견주어 볼 때, 슬기로운 백수는 삶의 내면을 무엇으로 채우고 단련하고 있는가?

놀란 가슴을 감추고 원대한 생각을 확장해 본다.




옛 사람들이 인재를 선발할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평가하였다.

몸(身), 말(言), 글(書), 판단(判).

본래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사람을 본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전체를 읽어내는 일이다.

하지만 전체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면 한면의 조각을 통해 전체를 추정하고, 그 추정과정에서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도 되지만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이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떠한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백수의 삶, 그 내면을 다듬는 네가지의 거울로 모양세 빠진 인간을 들여다 본다.






슬기로운 백수는

이를........

인간이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4가지 방식’이라 말한다.



1. 몸(身 ); 영혼, 마음이 머무는 집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그곳에 영혼이 머무는 집이다.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마음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볼 수 있는 영혼의 그림자이다.

몸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존중하느냐의 문제이다.

꼿꼿한 바른 자세는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단정한 태도이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경외하는

육체의 소리없는 선언이다.

침묵속에서 고요한 눈빛 하나, 절제된 손짓하나가 그 사람의 품격, 영혼을 담고 드러내는 것이리라.

몸을 바르게 세운다는 것은 결국, 영혼을 반듯하게 가다듬는 것임을



2. 말(言); 영혼, 마음이 흘러나오는 길


언어는 인간만이 가진 소통의 신비한 능력으로써 생각을 담아 외부로 옮기는 통로이자, 나의 영혼이

타인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다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말은 마음결과 함께하는 것이며 그 결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게 된다.


영혼의 결과 함께하는 말로 그 사람을 판단하며

보통 성질이 더럽다는 표현으로 한 성깔한다고 하는데 말에도 품격이 있어

성깔 → 성격 → 성품으로 명명했으리라.(개인적인 의견임)


말의 품격은 화려함이나 유창함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려 깊은 사람의 말에는 온기가 있고, 성숙한 사람의 말에는 침묵이 깃든다.

진실한 말은 짧더라도 그 묵직함에 오래 남는 울림과 감동이 있다.

말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듯하지만, 때론 비수가 되어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언어는 존재를 표현하는 생생하며 날카로운 날것임을



3. 글(書 ); 존재의 자취와 사유의 거울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기록한다’는 뜻이 있지만 그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이자 내면의

거울을 닦는 과정이라고 한다.


미완성인 인간이 글을 통해 성장하며 자신과 타인, 세상과 대화하는 존재의 흔적이다.

내면이 깊을 수록, 그 사람의 사유가 담긴 글도 깊어간다.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해 기록하는 그 마음에는 오롯이 인생이 담기기 때문에

늘 마음의 방향을 닮고 넓은 세상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글은 자유와 사상과 우주를 품어내는 힘이라 할 수 있다.


4. 판단(判 ); 지혜, 인간다움의 중심

무엇이 인간답고 무엇이 인간답지 않은가를 아는 것이다.

지식은 머리를 채우지만, 지혜(판단)는 마음을 세우는 것이리라.


판단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얻어지는 것이며 남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양심과 정의, 그리고 타인을 살리는 방향을 찾아내며, 계산이 아닌 '무엇을 더 깊이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지혜임이라.





사람의 겉모습 보다는,

우리가 어떤사람인가 보다는, 어떠한 방향으로 성숙해지고 있는가?

헛점 투성이로 빚어진 삶의 길 위에 더 단단하게 다듬어지고는 있는가?


슬기로운 백수로 살고자

오늘,


몸은 건강한 영혼을 담고 있는가?

말은 진실된 마음을 품고 사는가?

글은 진정한 세상을 품고 있는가?

판단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우선에 두고 있는가?



나는,

내일 또다시

어둠을 뚫고 용맹한 기세로 행인의 발걸음을 움츠리게 만드는

고양이의 눈에 모양새 빠지는 한심한 인간으로 비쳐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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