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락서 Jun 22. 2017

802,701년, 미래를 엿보다.

타임머신 - 허버트 조지 웰스

https://youtu.be/l8OX-qv_PG8

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의자에 앉아 시간을 유영하다


  째깍. 째깍.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립니다. 째깍. 째깍. 이런저런 소리로 가득 찬 삶이 적막에 빠져 부산 거리기를 멈출 때, 비로소 시계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죠. 요즘은 탁상시계마저도 디지털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핸드폰으로 확인하기에 시간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드뭅니다. 하지만 집 벽면 어디엔가 걸려있는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손목시계에 귀를 기울여보면 여전히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째깍. 째깍.


  때로는 그 소리가 너무 느려서 답답할 때도 있지요. 왜 이리 시간이 안 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들이요. 쉽게 생각해보면 점심시간을 목전에 둔 수업의 끝자락이라든지, 초조하게 그러나 초조한 티를 내지 않으며 기다리는 퇴근시간 등이요. 1초가 이렇게도 느렸나, 1분이 이렇게도 길었나 생각하며 의심해보는 그런 순간들이 있지요. 물론 반대의 순간들도 있습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것만 같을 때. 이제 막 시작한 연인과의 달콤한 시간, 출근을 앞둔 일요일 저녁 혹은 휴가의 마지막 순간. 그런 때에는 시계 초침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신경을 쓰건 말건 시간은 여전히 흐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죠. 그런 생각해본 적 다들 있으시겠죠? ‘아, 시간을 되돌려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혹은 반대로 ‘지금 이 시간을 건너뛰어 미래로 갈 수 있다면’ 이런 생각들이요.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을 때, 시간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지금의 난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지루한 순간에는 반대겠죠. 지금 이 순간을 그냥 건너뛰어 주말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혹은 좀 더 거시적인 관점으로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 역사의 한 장면을 면밀히 살펴보고 싶을 수도 있고, 미래로 나아가 인류 발전의 양상을 목도하고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상상은 사실 특별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일상적인 상상입니다. 시간을 여행하고 싶다는 상상. 인류는 언제나 시간여행을 꿈꿔왔습니다. 그리고 시간여행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마법과도 같은 장치 ‘타임머신(Time Machine)’입니다. 영화나 판타지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타임머신’은 인류의 시간여행에 대한 꿈을 충족시켜주는 장치입니다. 물론 아직 실현된 적은 없지만요. 오늘 이야기할 책은 바로 이 ‘타임머신’이 처음 등장한 소설, 허버트 조지 웰스(H. G. Wells)의 『타임머신(The Time Machine)』입니다.


  ‘허버트 조지 웰스’는 SF(Science Fiction) 문학 장르의 대부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타임머신』뿐만 아니라 『투명인간』, 그리고 2005년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한 『우주전쟁』의 원작자이기도 하죠.


  『타임머신』의 내용 구조는 액자식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시간여행자’(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에게 초대받아 찾아간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나’말고도 심리학자, 의사 등 저명한 인사들이 자리를 함께 하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시간여행자는 먼저 시간에 대한 우리의 통념과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모든 실물은 네 방향으로 뻗어 있네. 가로, 세로, 높이, 그리고 지속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우리는 (곧 설명하겠지만) 어떤 타고난 육체적 결함 탓에 이 점을 간과하기 쉽네. 분명 네 개의 차원이 있어. 세 개 차원은 공간의 세 변을 일컫고, 네 번째 것은 시간이지. 그런데 우리는 전자의 삼차원과 후자 사이의 비현실적인 선을 긋는 경향이 있어.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연히 시간을 따라 한 방향으로 단속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지.”


  그렇죠. 우리는 시간을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인식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나이 들기만 하지 젊어지지는 않으니까요. 이에 시간여행자는 시간을 중력에 비유합니다. 마치 중력처럼 시간은 올라가기보다는(거스르기보다는) 내려가는 게(앞으로 흐르는 게) 훨씬 쉽죠. 하지만 ‘기구(氣球)’가 있다면 어떨까요? 기구를 통해 우리는 조금이나마 중력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시간여행자는 생각합니다. 그에 맞는 기구가 있다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말이죠.


기구를 타고 중력을 거슬러 오를 수 있고, 궁극적으로 시간 차원을 따라 이동하다가 정지하거나 가속하거나 심지어는 방향을 돌려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는 희망쯤은 품을 수 있으니.”


  어떤가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시나요? 아니면 조금 일리 있는 말이라고 들리시나요? 여기서 시간여행자가 말하는 기구는 당연히 ‘타임머신’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빛나는 금속 구조물’을 가져와서 믿지 못하는 이들의 눈앞에서 기계를 작동시키죠.


한 줄기 바람이 불면서 램프 불꽃이 일렁거렸다. 맨틀피스 위 촛불 하나가 꺼지고, 그 작은 기계가 갑자기 회전했다. 흐릿해진 그것은 일순 유령처럼 보였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놋쇠와 상아의 어떤 소용돌이처럼 보였다. 그리고 사라졌다. 없어졌다! 테이블 위에는 램프만 휑뎅그렁했다.


  물론 신기하기는 하지만 정말 그 작은 금속물이 ‘타임머신’이라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후 시간여행자가 실물 크기의 타임머신을 만들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아무리 좋게 생각해준다고 해도 그런 말을 쉬이 믿기는 어렵지요.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은 다음 번 모임에서 시작됩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도 집주인 시간여행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후 7시 반이 넘어서야 시간여행자가 문을 열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지요.


시간 여행자는 굉장히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외투는 먼지투성이에 더러웠고 소맷자락은 녹색으로 더럽혀져있었다.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허옇게 센 것 같았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탓이거나 실제로 변색됐을 수도 있었다. 얼굴은 유령처럼 허옇고 턱에는 갈색의 벤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얼굴은 무지막지한 고생이라도 한 것처럼 수척하고 찡그린 채였다. 빛이 눈부시기라도 한 듯 그는 문간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곤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이 아픈 사람처럼 절뚝절뚝 걸었다.


  자, 이쯤 되면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요. 시간여행자는 이름에 걸맞게 자신이 만들었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고 온 것이지요. 그리고 ‘나’를 통해 시간여행자의 경험을 듣게 됩니다.


  처음에 시간여행자는 미래로 향하는 시간여행에 큰 기대를 갖습니다. 인류 문명의 진보가 계속되는 시기였기에 그 미래가 얼마나 휘황찬란한 결과일지 궁금했던 것이지요. 시간여행자가 도착한 시기는 서기 802,701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인류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죠.


  ‘엘로이’라는 이름의 미래인들은 키가 작은 소인들이고, 몸은 전체적으로 매우 연약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매우 단순한 것들을 지칭하는 정도일 뿐이고, 그저 하릴없이 들판을 뛰놀며 과일을 주식으로 살아갑니다. 큰 동물들은 이미 멸종하고, 어떠한 위험도 없어 보이며, 띄엄띄엄 숲 너머에 웅장한 크기의 잔해물들이 존재하죠. 시간여행자가 내린 결론은 조금 충격적입니다.


쇠퇴기에 접어든 인류를 내가 조우한 듯했다. 불그레한 황혼이 인류의 황혼을 생각나게 했다. 우리가 현재 기울이고 있는 사회적 노력의 기이한 결과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육체의 힘은 필요의 결과이므로, 안전한 상황은 연약함을 낳는다.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일, 생활을 끊임없이 안정화하는 참된 문명화 과정이 꾸준하게 진행되어 그 극점에 다다른 것이다. 인류가 힘을 합쳐 자연을 차례차례 정복하게 되었다. 지금은 꿈에 불과한 것들이 미래에선 계획적으로 착수되고 수행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를 나는 보고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802,701년의 미래에는 모든 문명화 과정이 극에 이르러 생활이 안정되었고, 그로 인해 모든 인류가 더 이상 어떤 고통, 두려움, 투쟁도 필요하지 않게 되어 그에 맞는 진화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시간여행이 단순히 이렇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타임머신이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죠. 처음에는 ‘엘로이’를 의심하지만 그들은 그럴 신체적 능력이 없고, 그만한 흥미를 가지지도 않습니다. 후에 시간여행자는 지하에 사는 ‘몰록’이라는 또 다른 인류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몰록’이 타임머신을 훔쳐 간 것이지요.


  ‘몰록’은 생김새가 괴기스럽습니다. 부정적 존재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익숙하지요. 시간여행자는 ‘몰록’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놈들이 얼마나 구역질 나는 마귀같이 생겼는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 하리라. 창백하고 턱 없는 얼굴, 눈꺼풀 없고 큼지막하고 불그스름한 회색 눈이란!’


  ‘몰록’은 ‘엘로이’와는 다르게 재빠르고 공격적입니다. 심지어 ‘몰록’은 육식을 하죠.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라면 이미 큰 동물들은 다 멸종하였는데, 어떻게 육식을 할 수 있을까요? 조금 힌트를 드려보자면, ‘엘로이’들 중에 노쇠한 이들이 없다는 점, 해가 지면 어둠을 틈타 지상으로 올라오는 ‘몰록’, 어둠에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는 ‘엘로이’들을 생각하면 ‘몰록’이 먹는 고기가 어떤 고기인지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여행자가 생각하기에 ‘엘로이’는 과거 자본가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돈의 힘으로 지상을 자연스럽게 차지했고, 하층민들은 지하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몰록’이 지하로 내려가게 된 하층민들의 후손들이 되었고요. 처음에는 이러한 수직적인 구조가 잘 운영되었으나, 인류 지성이 자살에 이른 이 시기가 되어서는 힘의 구조가 뒤바뀌게 된 것이라 추측하지요.


  시간여행자와 ‘위나’라는 ‘엘로이’의 관계도 묘사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진 않으려 합니다. 흡사 애인과도 같은 존재이지요. 물론 마지막 시간여행자의 실수로 ‘위나’를 잃게 되지만요.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간여행자는 타임머신을 재 탈취하여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급박한 상황을 벗어나느라 그보다 더욱 미래로 향하게 되지요. 그리고 인류가 모두 사라지고, 대부분의 생명체도 사라진 미래를 보게 됩니다. 시간의, 지구의, 모든 것의 끝을 보게 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시간여행자의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끝이 납니다. 물론 증거는 아주 빈약합니다. 그가 챙겨온 것은 위나가 자신의 호주머니에 꽂아준 흰 꽃 두 송이에 불과하죠. 그 스스로도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자네더러 믿어달라는 게 아니야. 거짓말이나 예언으로 치부하게. 실험실에서 꿈을 꾼 거라고 말하게. 인류의 운명을 사유하다가 지어낸 이야기쯤으로 생각하게. 사실이라는 내 주장을 그저 흥미를 돋우기 위한 얄팍한 기교쯤으로 받아들이게. ‘허구’라고 전제하고서 다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이후에 그를 찾아간 ‘나’는 다시 시간여행을 떠나려는 시간여행자를 보게 됩니다.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한 시간여행자였죠. 카메라도 챙기고 갖가지 도구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간여행자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나’는 말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사실 웰스의 작품은 과학소설이지만 동시에 비과학적입니다. 『타임머신』을 읽어보아도 과학적 근거는 거의 보이지 않죠. 이런 부분이 웰스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거부감이 들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는 웰스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입니다. 웰스는 지금 21세기 사람이 아닌 무려 1866년생으로 19세기 사람이죠. 그가 살았던 시기에는 지금 우리가 아는 많은 과학적 지식들이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오히려 그의 뛰어난 상상력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는 것이 더 맞겠습니다.


  웰스의 작품을 감히 평가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나타낸 과학적 열망’ 기회가 된다면 웰스의 작품 중 읽어 본 다른 작품 『투명인간』도 다뤄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두 작품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내용이 얼마나 과학적인지가 아닌 웰스의 문학적 상상력과 그에 맞는 적절한 서술이 인상적이었죠. 결과적으로 웰스가 후의 과학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긴 시간 축에서 끽해야 1세기를 사는 인간입니다. 구태여 더 말하지 않아도 쉬이 동의할 부분이지요. 언제까지 인류는 계속될 수 있을까요? 앞으로 100년? 아니면 1000년? 혹은 그 이상 계속할 수 있을까요? 매 시기 인류의 종말은 화두 거리입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 끝을 보지는 못하였죠. 그렇다고 낙관하기는 어렵습니다. 여전히 인류는 고통받고, 분쟁은 끊이지 않고, 갈등은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웰스의 인류 미래에 대한 절망적 비관은 너무 엇나간 것이라고 폄하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현재를 벗어나고픈 시간여행에 대한 인류의 열망. 여러분이라면 시간여행자가 만든 타임머신에 앉아 어느 방향으로 레버를 당기시겠습니까? 과거? 혹은 미래?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될까요? ‘시간여행자들의 모임’에서 모여 자신이 보고 생각한 것을 말하는 장면도 흥미롭겠군요. 『타임머신』이었습니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어둡게 보았다. 쌓아 올린 문명이 필연적으로 무너져서 결국에는 그것을 쌓아 올린 자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헛고생이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듯 살아낼 도리밖에 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 미래는 여전히 암흑이고 공백이다. 기억에 의존한 그의 이야기가 밝힌 몇몇 군데만 빼면 광활한 미지다. 나는 위안 삼아 이상한 흰 꽃 두 송이를 곁에 두고 있다. 이젠 갈색으로 쭈그러들고 납작해지고 버석버석해진 그 꽃은 지력과 체력이 사라진 미래에도 여전히 감사하는 마음과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인간의 가슴속에 살아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운명이 만나는 자리, 광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