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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Aug 04. 2020

하얀 김치전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아마도 내가 직접 만들어 나눈 음식이 아니라면 느끼기 힘든 감정일 것이다. 한 솥에 직접 끓인 심심한 된장찌개를 나눠 먹을 때 우리는 비로소 따뜻한 한 식구가 되리라. 그 맛있는 추억은 어쩌면 사내아이가 부엌에 드는 것을 싫어하실지 모를 집안에서도 결국 아이가 그곳을 사랑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식탁의 맞은편에서 맛있게 먹어줄 누군가를 생각하며 칼에 베이고, 불에 데는 줄도 몰랐을 그 아이.


십 수년 전이었을까. 문득 김치전이 먹고 싶어 진 어린아이가 있었다. 주황빛의 윤기가 은은한 아지랑이를 타고 흐르는 바삭한 김치전. 아이는 상상만으로도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침이 고였다. 어느새 아이의 손에는 그 꼬질꼬질한 얼굴을 닮은 책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앞부분의 몇 장은 찢어져 제목을 알 수 없고 버려져 누렇게 익어가는. 언제 마지막으로 꺼내보았는지 알 수 없이 그저 책장 속에 파묻혀 묵어가는 그런 시큼한 한 권.  책장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그 책을 어떻게 찾았는지 아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선명하게 남아 아이를 두고두고 행복하게 했다.


일하러 가신 부모님의 빈 공간에 남겨진 아이는 그날 누런 종잇장이 선물한 부엌의 열기를 두고두고 기억했다. 아이는 그저 책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김치를 물에 씻어 양념을 걷어내고, 잘게 다졌다. 칼은 위험하니 만지지 말라고 부모님께서 신신당부하셨지만, 배가 고픈 아이에게 그런 당부는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날 뿐이다. 밀가루와 물을 섞은 반죽에 다진 김치를 넣고 섞은 후 한 국자씩 떠서 프라이팬에 올려 부치기 시작했다. 이십 분정도 지났을까, 접시에 올라온 음식은 간신히 밀가루 색만을 간직하고 있는 허여멀건 김치전. 상상과는 너무도 다른 실망스러운 모습에 아이는 얼른 그 덩어리를 먹어치워 숨기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의 첫 요리를 자랑하고픈 구석이 조금은 있었는지 아이는 부모님의 몫을 따로 남겨두었다. 어머니는 그날 분명 맛있다고 하셨다.


어느덧 스물이 넘은 청년이 되어서도, 홀로 스칸디나비아에 두 발을 디뎠을 때에도 그 부엌은 항상 열기로 가득했다. 언젠가 집이 그리웠을까, 집밥이 그리웠을까. 오로지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하기로 마음먹기도 했다. 라면으로 시작해 닭볶음탕과 갈비찜까지. 냄비가 열기를 내뿜었던 시간만큼 타지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그럼에도 어쩌면 너무나 외로웠기에 매번 음식을 더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혼자 하는 식사에서도 그 냄비에는 어김없이 한 가족이 먹을 양의 음식이 만들어져 있었다. 덕분에 그곳에서도 가끔은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 그 친구들은 아직도 나를 'Chef Choi'라고 한다.


군에 복무 중인 지금도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지금은 생활관에 아침마다 작은 카페를 열고 있다. 믹스커피가 아닌 핸드드립 커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향긋한 하루의 시작이다. 텀블러에는 여전히 한 가족이 마실 수 있는 양의 커피가 우러나온다.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콜드 브루, 밀크티. 요리라고 하기엔 조금 아쉽지만 아무쪼록 맛있는 추억을 만들기에는 안성맞춤인 듯하다. 마시는 것만 봐도 향긋해지는 그 감정은 군생활의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곤 한다.


책이 시키는 대로, 또는 아이의 마음대로 만들어낸 어느 최초의 덩어리. 그리고 그것을 맛있다고 해주신 어머니. 기름에 덴 줄도 모르고 좋아했던 그때의 맛있는 기억 한 조각. 아이는 그날부터 마음의 거실에 부엌을 마련해두었다.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따뜻한 밥 한 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설 여유 공간인 셈이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믿기 어려웠던 이야기. 십 수년 전의 하얀 김치전은 그 이야기를 사실로 빚어내는 데에 꽤나 큰 역할을 맡았는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빚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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