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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끝낸다는 건 지우는 게 아니야

여백을 남기는 마무리

by 수요일

나는 오랫동안 ‘끝낸다’는 것은
깔끔하게 지워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할 일 목록에서 완료 표시를 하고,
필요 없어진 파일을 삭제하고,
더는 돌아볼 필요가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
그래야 비로소 모든 것이 정리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무언가를 끝내면 시원하기보다 허전했다.
깨끗하게 지워진 자리에는 공백이 생겼고,
나는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해
쉼도 없이, 다시 다른 일로 채워 넣곤 했다.


그렇게 채운 일들도 끝나면 또 지워졌다.
나는 계속 무언가를 메우고 지우는 일을 반복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수첩 속에서 오래된 회의록 메모를 발견했다.

이미 끝난 프로젝트의 회의록이었는데,
거기엔 그때의 고민, 웃음, 작은 시행착오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우지 않고 남겨둔 그 흔적이
생각지도 못한 큰 위로가 되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끝낸다는 것은 흔적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 흔적을
다음 단계로 옮겨두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해야 할 일을 마쳤다면, 그 과정을 기록해 남겨두자.

감정을 마무리했다면, 그 감정이 내게 가르쳐준 걸 한 줄이라도 써보자.

관계가 끝났다면, 그 사람과의 좋은 순간을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접어두자.


마무리는 지우는 것이 아니라,
다시 꺼내볼 수 있는 여백을 남기는 일이다.


여백이 있으면,
그 안에서 배움도, 추억도,
그리고 다시 나아갈 힘도 자라난다.


이제 나는 할 일을 끝냈을 때, 단순히 체크 표시만 하지 않는다.

간단한 메모를 남기고, 그날의 마음을 덧붙인다.


그 기록들은
언젠가 다시 나에게 꼭 필요한 순간에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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