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이전부터 개봉을 기다리던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박찬욱은 <올드보이>로 진작에 천재성을 인정받은 감독이지만, 나는 그의 비범함을 <아가씨>에서 엿보았으므로 다음 작품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예고편을 보고는 더욱 기대했다. 본격적인 멜로 영화라니. 박찬욱이 그리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중국인 여자 '서래'는 무척이나 모호한 사람이다. 남편을 죽인 살인자인지 혹은 남편의 가학적인 소유욕 아래 희생된 가여운 피해자인지, 엄마를 살해한 존속살인범인지 혹은 할머니들을 진진한 성심으로 돌보는 성실한 요양보호사인지, 팜므파탈인지 혹은 그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한 여자인지. 파랑으로도 보이고 녹색으로도 보이는 원피스처럼 분명하지 않고 아리송하다.
반면 베테랑 형사인 '해준'은 분명한 사람이다. 거친 일을 하는 직업에 오래 몸담은 사람 같지 않게 매너 있고 인간적이며 깔끔하다. 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니고 다니며, 주머니마다 물건의 자리가 정해져 있을 만큼 확실한 남자다.
이렇게나 달라 보이는 둘은 그러나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다. 초밥을 다 먹은 후에 상을 치우는 합이 척척 맞고, 미결 사건의 잔인한 현장 사진을 집 한 편에 걸어둔 해준처럼 서래도 남편의 시체 사진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해준이 자기 입으로 '우리는 같은 종류의 사람'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이 해준이 서래에게 끌린 이유 중 하나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서래가 남편을 죽인 진범이라는 걸 알게 되자 이 확실한 남자는 '붕괴'된다. 이제까지 자부심을 느끼며 쌓아오고 누려왔던 자신과 자신의 세계 모두.
내가 품위 있어서 좋다 그랬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에서 나오는 겁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붕괴됐어요.
해준은 서래의 범죄를 밝힐 유일한 증거였던 휴대폰을 돌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깊은 바닷속에 버려요. 아무도 못 찾게...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11개월 후, 부인이 있는,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도시 이포로 거주지를 옮긴 해준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서래는 그간 새 남자를 만난다. 해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나 서래는 이 남자를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 결혼한다.
그러나 해준을 잊지 못한 서래는 빚쟁이를 피해 몸을 피할 곳으로 해준이 있는 이포를 선택하고, 둘은 재회한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서래의 남편이 또다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해준은 분노하며 서래를 추궁하지만 곧 그녀의 남편이 채무 관계였던 '철성'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게 밝혀진다. 그러나 마침내는, 철성이 '내 어머니가 죽으면 네 남편을 죽이겠다'는 말을 기억한 서래가 네 알의 펜타닐로 그의 어머니를 죽여 남편을 살해하게끔 만든 미필적 고의가 있었음이 드러나며, 해준은 결국 이 사건의 배후에 또 서래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해준은 도무지 서래라는 여자를 믿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자면 자신의 모든 것이 붕괴된다. '나 같은 여자는 이렇게 해야만 당신을 만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여자를 사랑하게 돼버리면 해준의 자아는 산산이 조각난다. 그가 믿어왔고 지켜왔던 모든 세계가 파도 앞의 모래처럼 부서지고 깨어진다. '서래 씨는 꼿꼿해요. 난 그게 서래 씨에 대해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했어요.' 해준이 읍소하듯 내뱉는 이 말은 결국 언제까지나 꼿꼿하고 싶은 해준의 이상과 또한 서래가 자신이 목격한 것처럼 바르고 곧은 여자이길 바라는 처절한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고소공포증이 있는 자신 대신 엄마의 유골을 뿌려달라는 서래의 부탁에 해준은 절벽에 서서 유골을 뿌려준다. 그리고 등 뒤로 서래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각오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서래는 해준을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간절하게 껴안는다.
그리고 서래는 사라진다. 사라진 서래를 뒤쫓는 해준은 서래에게 전화를 건다. 서래는 당신이 나에게 사랑했다고 말하고, 해준은 내가 그런 말을 했었냐고 되묻는다. 서래는 허탈하게 웃는다. 그리고 영화는 녹음된 해준의 목소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는 서래의 모습을 비춘다.
깊은 바닷속에 버려요. 아무도 못 찾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서래를 지켜주었던 해준의 그 말 자체가 서래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었으나, 정작 해준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해가 지는 바다, 거친 파도가 치는 그 바닷속에서 사라진 서래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찾을 때야 비로소 깨닫는다.
서래에게로 가지 않으려 걸었던 그 모든 길이 사실은 오롯이 서래를 향한 길이었다고.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나희덕, <푸른 밤>
서래는 미결 사건에 집착했던 해준에게 마침내 미결의 사랑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그건 서래에게 '헤어질 결심'이자 '사랑할 결심'이었다.
곧 밀물이 들어찰 바다 가운데 구덩이를 파고 들어간 서래는, 자신을 덮쳐오는 물을 느끼며 만조 속에 잠긴다.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낮은 곳으로>
서래는 모호한 사람이었을지언정 분명하게 사랑했고, 해준은 분명한 사람이었을지언정 자신의 사랑에 모호했다. 그 간극이 두 사람을 이 같은 결말로 이끌었다. 마침내.
그들의 사랑은 서래의 뜻처럼 미결로 남았다. 아마 서래는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해준은 영원히 서래를 찾아 헤맬 것이다.
그것이 이 사랑의, 그리고 이 영화의 완결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