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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I 워페어

3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냉전 승리

1장. 전쟁의 서막, 역사를 되돌아보다 中

by 최재운

1983년, 소련군 참모총장 니콜라이 오가르코프(Nikolai Ogarkov)는 비공식 석상에서 미국 관계자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이제 소련은 미국 무기의 질적 우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병력과 무기의 숫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미국에서는 아이들까지 컴퓨터를 갖고 놀지만, 소련 국방성 사무실에는 컴퓨터 한 대조차 없다고 털어놓았다. 사실상 냉전의 승패가 총탄이 아닌 기술 혁명, 즉 '제3차 산업혁명'으로 기울고 있음을 인정한 순간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치열했던 냉전은 단순한 군비경쟁을 넘어 과학기술 혁신의 경쟁 무대이기도 했다. 반도체와 컴퓨터, 통신 네트워크, 우주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온 제3차 산업혁명은 미국에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안겨주었고, 이는 결국 냉전 승리의 발판이 되었다. 총성 없는 패배였다. 거대한 제국과도 같았던 소련은 핵폭탄이 아닌 작은 반도체 칩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야기는 195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자,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하루 약7회 미국 상공을 통과하며 500마일 위에서 전자음을 송출하는 스푸트니크에 미국은 그야말로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그리고 미국은 로켓과 미사일 기술뿐만 아니라 전자공학과 반도체 분야에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때마침 1958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의 잭 킬비(Jack Kilby)가, 1959년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의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가 최초의 집적회로(IC, integrated circuit)를 발명했다. 손톱만 한 칩 하나에 수백 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약시킨 것이다.


처음엔 누구도 집적회로에 관심이 없었다. 너무 비쌌고 쓸 곳도 애매했다. 전환점은 미국 정부의 대규모 주문이었다. 펜타곤과NASA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 공군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니트맨과 아폴로 달 탐사선의 유도 컴퓨터에 반도체가 탑재되며 산업이 생존할 수 있었다. 민간에선 아무도 사지 않던 비싼 칩을 정부가 대량으로 사들인 것이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는 1965년 매출의 60%를 공군 칩 주문으로 채웠다.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초기 손실을 감수하고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군사 수요 덕분이었다. 그 결과 1971년 인텔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들어냈고, 컴퓨터 혁명이 시작됐다.


잭 킬비가 발명한 최초의 집적회로


반면 소련은 어땠을까? 처음엔 자체 개발을 시도했다. 하지만 곧 포기하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방 기술을 훔치는 데 집중했다. 실제로 소련 정보기관은 냉전 기간 내내 미국의 칩과 설계도를 빼돌렸다. 하지만 훔친 기술로는 한계가 있었다. 복제는 할 수 있어도 혁신은 할 수 없었다. 1980년대가 되자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미국은 어린이 장난감에도 칩을 넣었지만, 소련은 군 수뇌부조차 개인 컴퓨터가 없었다. 미국 전투기는 디지털 컴퓨터로 정밀 폭격을 했지만, 소련은 수십만 개의 진공관으로 이뤄진 구형 컴퓨터를 간신히 집적회로로 바꾸는 수준에 머물렀다.


반도체만이 아니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국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정보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으면 핵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 네트워크 구축에 나섰다. RAND 연구소의 폴 바란(Paul Baran)이 핵심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어느 한 곳이 파괴되어도 우회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치 뇌 신경망과 유사한 분산형 네트워크였다. 미국 국방부의 고등연구계획국(ARPA,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은 이 개념을 발전시켜 연구 기관들을 전화선으로 연결하는 획기적인 컴퓨터 통신망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1969년 10월, 캘리포니아 UCLA와 스탠퍼드를 연결하는 아르파넷(ARPANET)이 탄생했다. 인터넷의 시초였다. 그리고 인터넷은 단순한 군사용 통신망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인류 문명 전체를 뒤바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연구 기관과 대학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네트워크는 곧 민간 부문까지 파고들며 정보 공유와 소통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냉전의 산물로 태어난 기술이 결국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거대한 혁신으로 발전한 것이다.


당연히 소련도 비슷한 시도를 했다. 아나톨리 키토프(Anatoly Kitov)라는 군 공학자가 전국 컴퓨터 통합망을 제안했다. 군사망과 민간 경제를 연결해 자원 배분을 최적화하는, 오늘날 인터넷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소련 상부는 이를 불온하게 여겨 키토프를 해임한다. 당적까지 박탈하면서 말이다.


결과는 명확했다. 미국은 통합된 네트워크로 정보를 실시간 공유했고, 이때 발전시킨 인터넷 기술을 민간 부문에서도 활용하며 관련 산업을 선도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소련은 공군 방공망, 미사일 경보망, 우주감시망을 각각 따로 운영했다. 파편화된 파이프식 시스템을 고집한 탓에 정보 공유와 종합 분석이 어려웠다. 실제로 1972년 미 중앙정보국(CIA)은 소련의 탄도미사일 조기경보망이 대규모 공격에 거의 무력하다고 평가했다. 수천 기의 핵미사일을 보유하고도 정작 상대의 공격 징후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기이한 약점을 드러낸 셈이었다.


하늘에서도 격차는 벌어졌다. 전략 정찰은 2차 대전 때부터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냉전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말까지 미국은 U-2 같은 고고도 정찰기로 소련 영공을 날며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1960년 5월 1일, 소련이 U-2기를 격추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은 곧바로 우주로 눈을 돌렸다. 코로나(Corona)라는 극비 정찰위성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초기엔 디지털카메라가 없어서 촬영한 필름을 캡슐에 담아 지상으로 떨어뜨려야 했다. 문제는 이 캡슐을 어떻게 회수하느냐였다. 해법은 영화 같았다. 하와이 상공을 지나는 캡슐을 공중에서 낚아채는 특수부대를 만든 것이다. C-119, C-130 등 수송기 뒤에 갈고리를 매달고, 낙하산을 펼친 캡슐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이 부대의 모토가 걸작이었다. "별똥별을 낚아채라! (Catch a Falling Star)"


Catch a Falling Star!


원시적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1960년대 미국은 심각한 공포에 빠져 있었다. 소련이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고 있다는 ‘미사일 갭(Missile Gap)’ 논란이었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미사일을 “소시지처럼 찍어낸다”라고 호언장담했고, 미국은 실제로 뒤처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코로나 정찰위성이 보내온 사진이 진실을 밝혀냈다.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촬영한 결과, 실제 ICBM 숫자는 미국의 우려보다 훨씬 적었다. 과장된 공포는 정확한 정보 앞에서 사라졌다.

기술은 계속 발전했다. 1970년대 운용된 KH-9 헥사곤 위성은 아예 버스만 한 크기였다. 길이 16미터, 무게 13톤. 거대한 카메라로 소련 전역을 정밀 촬영했다. 필름 카세트도 최대 16개까지 탑재해 차례대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진짜 혁명은 1976년 발사한 KH-11 케넌(KENNAN) 위성이었다. 디지털 센서를 탑재해 촬영 즉시 지상으로 전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미국은 단 몇 시간 안에 세계 어디서든 일어나는 일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위성이 제공한 정확한 정보는 게임 체인저였다. 미국 지도자들은 이제 추측이 아닌 사실에 근거해 정책을 결정할 수 있었다.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협상장에서도 미국 대표단은 소련의 모든 미사일 기지 위치를 알고 있었다. 당연히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CIA는 이러한 정찰위성 정보의 가치를 “계산 불가능”이라고 평가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는 뜻이었다.




이 모든 첨단 기술 우위의 배후엔 한 기관이 있었다. 국방고등연구계획국, DARPA(Defense ARPA)다. 1958년 스푸트니크 충격 직후, 미국의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은 단호했다. "또 다른 기술 기습을 당하지 말라." 그는 우주 분야엔 NASA를, 국방 분야엔 ARPA(훗날 DARPA)를 설립했다. DARPA는 독특했다. 조직은 작았지만 움직임은 빨랐다. 실패 위험이 크더라도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프로젝트라면 과감히 투자했다. 전통적인 군사 기술 개발 부서와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었다.


특히 DARPA는 베트남전에서 여러 신기술을 실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글루 화이트(Igloo White) 작전이었다. 라오스 정글의 호찌민 루트를 따라 수만 개의 음향 센서를 뿌려놓고, 센서가 감지한 소리를 하늘의 중계기로 전송했다. 태국에 있는 컴퓨터 센터가 이를 분석해 적 차량이나 병력의 움직임을 파악하면, 곧바로 전폭기에 공격 지시를 내렸다. 세계 최초의 실시간 전자전 시스템이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시도였지만 비용은 18억 달러나 들었고, 베트남전의 결과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장성들은 이 작전을 주도한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국방부 장관의 이름을 따 "맥나마라의 전자 울타리"라고 비아냥거렸다.


맥나마라의 전자 울타리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가 달라졌다. 1980년대엔 선구적 시도로 재평가받았고, 1990년대 들어서는 전자전이 수소폭탄 이래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군사 기술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드론 감시와 정밀 타격의 원형이 바로 이 작전이었다.


무인기도 빼놓을 수 없다. 1964년부터 '라이트닝 버그' 무인기가 베트남과 중국 상공을 날았다. 극비여서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트남전은 역사상 최초로 무인기가 광범위하게 운용된 전쟁이었다. 이 무인기들은 적 방공망이 발사한 SA-2 지대공미사일의 전파를 녹음해 미군의 전자전 대책 수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또한 DARPA는 경량화 자동소총 M16의 실전 테스트를 주도했고, 레이저 유도폭탄 개발에도 깊이 관여했다. 1972년 실전 투입된 페이브웨이(Paveway) 레이저 유도폭탄은 기존 폭탄보다 100배나 정확했다. 몇 년간 파괴하지 못했던 하노이 인근의 '용의 턱' 철교를 단번에 무너뜨렸다. 이처럼 DARPA는 베트남전을 통해 미래 전쟁의 모습을 미리 실험했다. 당시엔 비용 대비 효과가 의심받았지만, 이 기술들은 훗날 걸프전과 이라크전에서 압도적 위력을 발휘하며 현대전의 표준이 되었다.


학계와 산업계, 그리고 군을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하며 소규모 투자로 엄청난 혁신을 끌어낸 DARPA. 그들의 성공 방식은 '다르파 웨이(DARPA Way)'라 불리며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ARPA는 설립 당시 미국 전체 컴퓨터 연구비의 70%를 지원하면서도, 관료적 통제는 최소화하고 연구자들에게 자유를 보장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성공한 기술은 군이 즉시 채택하도록 조율했다. DARPA가 개발을 이끈 기술은 시간이 흐르며 군을 넘어 민간 산업까지 혁신했다. 인터넷, GPS, 음성인식, 자율주행차. 우리 일상을 바꾼 기술 대부분이 냉전 시절 DARPA 프로젝트에서 시작됐다.




1980년대 미국의 전략은 명확했다. 정부 주도의 기술 혁신으로 소련의 양적 우위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보이는 건 맞출 수 있고, 맞출 수 있는 건 파괴할 수 있다"라는 구호 아래, 미군은 스텔스기로 적의 방공망을 뚫고, 위성으로 전장을 손바닥 보듯 감시하며, 정밀유도무기로 핵무기 없이도 소련군을 제압할 수 있음을 과시했다.


소련 군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막아낸 전통적인 양적 우위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Gorbachev)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도 이미 늦었다. 오가르코프가 통찰했듯이, 정치적 개혁 없이는 기술 혁명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개혁은 결국 체제 자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1991년 소련이 무너졌을 때, 많은 이들이 경제 실패를 원인으로 꼽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경제 실패의 근저에는 기술 경쟁의 패배가 있었다. 미국은 디지털 혁명을 통해 경제와 군사력을 동시에 발전시켰지만, 소련은 낡은 산업 구조와 과도한 군비 지출에 짓눌려 있었다. 미국은 대학, 기업, 정부가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혁신 생태계를 구축했다. 반면 소련의 경직된 관료 체제는 인재의 활용과 새로운 아이디어의 확산을 가로막았다. 1980년대에 이미 냉전의 승부는 총성 없이 결정되고 있었다.


미국의 승리는 군사력의 승리가 아니었다. 과학기술과 혁신 시스템의 승리였다. 작은 반도체 칩이 거대한 소련 제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세계를 제패할 국가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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