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했던 스무 살의 너와 나
겨울 추억 꺼내보기
스무 살의 겨울, 뷔스티에 치마에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살 어는 추위 속에서 애인과 청계천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26살의 나는 감기라도 걸릴까 짐이 되더라도 패딩을 들고 나오는데 한 겨울에 치마라니. 사랑에 빠진 스무 살의 나는 날씨도 이기는 무적 인간이었다.
그런 나는 참 눈치도 없었다. 그때는 방탈출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고 너무 재밌었던 나머지 애인에게 또 하러 가자고 졸랐다. 애인은 나중에 가자고 말했지만 나는 계속 고집을 피웠다. 애인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날 그 사람의 눈물을 처음 봤다. 알고 보니 그는 나와의 데이트 때문에 예산보다 큰 지출을 해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학교가 같아 거의 매일 만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알바를 해서 돈 걱정이 없었던 나는 그의 사정을 전혀 몰랐다. 지방에서 올라와 가족 없이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인데, 돈이 없어 끼니도 대충 때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얘기를 듣고, 안일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했던 창피함과 상대의 상황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나의 부족함에 미안함이 몰려왔다. 나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속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음이 무너졌다. 그렇게 영하의 날씨에 인적 드문 청계천 한복판에서 우리는 부둥켜 울었다.
롯데리아에서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말했다. 힘든 게 있으면 나에게 말하라고. 돈은 아무 상관없었다. 나한테 중요한 건 그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했고, 그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추억이다.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잘 보이고 싶었다. 천진했던 스무 살이기에, 스무 살이라서 가능했다.
이제는 안다. 그 사람은 힘든 걸 타인에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혼자 힘들어하고 혼자 이겨내는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먼저 알아보려고 노력한다.
아직도 서툰 나지만.
‘아~ 이거 왜 썼어!’라고 진절머리 칠 그의 모습이 눈에 훤하지만,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우리의 모습을 겨울을 핑계 삼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