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원이 창작과 비평의 공간으로
갑자기 정말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부산역에 위치한 창비 부산.
부산사람이지만 부산역까지 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나는 그걸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다.
이미 예정되어 있었지만, 엄마가 동생과 함께 일본여행을 가게 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엄마의 캐리어를 끄는 짐꾼이 되었고, 세 번째로 오는 시내버스를 타고 지하철 역으로, 지하철역에서 다시 부산역으로, 부산역 안에서 다시 KTX 열차 안으로.
캐리어를 짐칸에 고이 모시고, 엄마를 자리에 안내하고 인증샷까지 찍고 야무지게 배웅을 마쳤다.
앞으로 4일간의 휴가를 얻었다.
도비 is free.
엄마의 배웅을 마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다 정시 출발임에도 느긋하게 내려오는 한 사람을 보았다.
나만 '저 사람 달려서 내려와야 할 텐데' 생각했을 뿐, 그녀는 아주 여유롭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열차는 그녀를 바로 5cm 앞에 두고 문이 닫혀버렸고, 황망하게 열차를 보내는 한 여성을 보았다.
모든 예매한 차들은 정시출발이라오.
자신의 잘못 보다는 원망의 눈초리로 달려가는 KTX를 바라보는 사람을 구경하는 나.
역시 밖에 나오면 볼거리, 구경거리들이 가득하다.
다음에는 꼭 명심해 두고 시간약속을 지키시게.
나는 이제 나만의 자유를 즐기기 위해 떠나겠소.
이 아침에도 부산역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행을 온 건지 가는 건지.
자기 몸통보다 큰 캐리어를 끌고 부지런히 다니고 있었다.
여행이란 건 좋은 것이죠.
반복된 매일을 살아가는 이유는 몸과 마음의 여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가.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신들의 여행에서 좋은 일들만 일어나기를.
엄마의 일본여행의 즐거움과 동생의 봉양에 힘듦이 아주 조금만 있기를 바란다.
9시 6분 차로 보내고 나니, 아주 시간이 많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창비부산은 오전 10시에 문을 열어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다.
월요일 휴무.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휴무다.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어도 9시 20분.
괜히 주변을 기웃거려 본다.
초량전통시장은 9시가 넘어도 문을 연 상점이 별로 없다.
옥수수 강매를 당할 뻔하였지만, 도비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창비 부산 바로 뒤편에 자리한 탑마트에 가서 괜히 눈요기도 해본다.
드디어 10시.
1927년 최용해 씨가 서양식 벽돌 건물로 지은 '부산 최초의 근대 종합병원' 백제의원은 현재 국가등록문화재 제64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가치 있는 장소다.
병원에서 시작한 건물은 중국요릿집, 장교 숙소, 임시 대사관, 예식장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다가 이제는 1층은 카페, 2층은 문화공간으로 사람들에게 근현대사의 역사를 품은 건물로서 사랑받고 있다.
차보다는 글을 좋아하는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2층의 창비 부산으로 향했다.
입구에는 물과 컵이 준비되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종이컵이 없는 정수기를 아주 오랜만에 보았다.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창비 부산과의 인사가 반갑다.
곧 직원분이 나오셨고 첫 방문인지 물으셨다.
그렇다 하고 답하니, 자세한 안내가 있었다.
첫 방문에 반드시 안내사항을 숙지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창작과 비평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문화공간이다.
판매하는 책과 열람 가능한 책이 나뉘어 있었다.
책의 아랫부분에 있는 흰색스티커가 열람 가능의 표시다.
약속은 지켜줘야 아름다운 관계가 유지된다.
그리고 좌석에 앉아 책을 읽고 싶다면 인스타 창비와 창비부산 팔로우를 하거나, 창비의 회원이면 무료로 언제든지 사용가능하다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첫 방문의 선물로 주어지는 메모지도 잊지 않으셨다.
책을 보다가 좋은 구절이 있으면 담아 가라는 배려가 따스하다.
책장에는 정말 다양한 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만화책, 역사책, 소설책, 과학책, 철학책 등등.
이런 문화공간에 나오면 나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선호한다.
두께가 얇으면 더 손이 간다.
그렇게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손에 잡히는 책들이다.
서서 읽다가 바로 자리를 잡고 읽을 수밖에 없는 흡입력이 있었다.
정이현 작가님의 [하트의 탄생], 김애란 작가님의 [칼자국] 2권을 금세 읽었다.
지금의 배경을 담은 글과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글을 동시에 읽으니, 내가 앉아 있는 이 공간이 속도를 초월해 마치 지구 밖에서 나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단편집 중에서 좋은 글을 엄선해서 특히나 책을 고르는 데에 있어서 고민할 시간을 줄여준다.
다 읽어보고 싶을 만큼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들이다.
이제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싶다고 말한 친구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눈에 꼭 들어온 시집이다.
아주 오랜만에 시집을 읽는다.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
얼마큼? 수채화처럼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포스터물감처럼 쨍한 색감이 아닌 물을 머금은 연한 수채화처럼.
읽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표현이다.
은유적 표현이 이렇게 아름답다.
시는 함축적이지만, 그 의미가 내 머리와 마음에 와닿았을 때는 마치 망치로 맞은 것처럼 큰 울림이 온다.
그리고 되새겨본다.
나도 저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책의 나이가 벌써 30년이 되었다.
유홍준 작가님이 쓰신 책들과 작가님의 소지품, 애장품들이 같이 전시되어 있었다.
역시 신뢰의 나라 한국에서 가능한 전시다.
예전 tv방송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에서 소개된 작가님의 책을 기억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배흘림기둥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렇게 나의 첫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정독이 시작되었다.
선조의 지혜와 기술력이 집약된 아름다운 배흘림기둥에 전 국민이 관심을 기울였던 때다.
이렇게 힘이 있는 글이라니.
세상에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그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작가의 방에서 한참을 구경했다.
부지런히 걷고 공부하고 다시 글로 풀어내는 작가의 삶이 그대로 상상되는 재미있는 공간이다.
책 읽는 사람은 책갈피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한 번에 책을 다 읽기는 힘들다.
조각조각 읽을 때 꼭 필요한 것이 책갈피다.
나는 오선영 작가님의 단편집 [호텔 해운대]에서의 한 부분인 '후원명세서'의 문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결핍을 양파껍질에 비유한 표현이 마음에 와닿았다.
애써 괜찮아 보이려 노력했지만, 다른 모양의 결핍이 드러나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는 타인의 다양한 생각과 표현방법에 늘 호기심이 많고 감동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기 창비 부산에 온 것이 참 좋다.
빈손으로 왔는데 선물을 한 아름 받았다.
좋은 책들로 마음이 가득 차고, 손바닥 사이즈의 꽤 괜찮은 메모지와 다다익선 책갈피.
그리고 다시 오고 싶은 아늑하고 편한 공간.
친구나 지인이 부산역에 온다면 손잡고 데려올 장소가 더 늘어서 참 좋다.
이 건물에 대한 이야기, 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는 만화책을 추천하겠지.
내 취향을 한껏 뽐낼 수 있는 멋진 문화공간 창비 부산에 오길 잘했다.
그리고 나는 창비 부산 바로 앞에 있는 베이글 집으로 갑니다.
마음을 채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허기를 채우는 것은 본능입니다.
당신의 하루에도 몸과 마음의 허기가 없는 든든함이 깃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