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며칠 전 재미있는 북콘서트에 다녀왔다.
작가가 쓴 글을 작가와 함께 톺아보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창 진행하던 중에 작가님이 누군가의 책을 예로 설명해 주셨다.
바로 우리나라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잘 쓰인 글은 누군가의 교본으로 다시금 상기된다.
출간하자마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세계적인 상을 수상하고는 그의 모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적을 일으켰다.
책 읽는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작가의 글이 또 읽고 싶어졌다.
연작으로 쓰인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영혜이지만, 그녀가 아닌 옆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 나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채식주의자를 새롭게 읽는다.
(영혜의 남편)
특별하지 않은 점이 좋아 결혼한 아내가 특별해지고 있다. 아니 이상하다.
별안간 밤잠에 들지 않고 멍하니 있다가, 냉장고에 들어있던 고기들을 꺼내 버리는 행위를 보았을 때.
왜 그러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저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마치 꿈이었으면 하는 상황을 만들어놓는 그녀는 아주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할 수 있다. 집에서 그녀와 먹는 식사만 채식을 하면 되니까.
하지만 고기냄새가 난다고 자신과의 스킨십을 거부하는 아내를 감내해기는 조금 힘들다.
그래서 처가 식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렇게 마련된 식사자리에서, 장인의 무지막지한 폭력과도 같은 행위를 보았고, 아내는 커다란 감정의 동요를 보였고,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특별하지 않아서 결혼한 여자가 특이하다 못해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내 탓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그녀를 버리기로 한다.
(영혜의 형부)
딱히 지금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중년의 예술가. 부지런한 아내 덕에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만, 그렇다고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불만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무언의 행동이 그를 옥죄어온다.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작업실은 예술가 단체의 지원으로 편하게 이용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불편하다. 그저 자신이 보고 듣는 것, 생각하는 것을 담아내는 것에 골똘할 뿐이다.
어느 날 아내가 무의식적으로 한 말에 꽂혀버렸다. 유아시절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몽고반점이 아직도 동생의 몸에 남아있다는 그 문장이 의식에 박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든다.
아내보다 아름답지도, 여성스럽지도 않은 처형의 몽고반점이 그립고,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
처형의 이상스러운 행동에 점점 매료된 듯, 그녀에게 천천히 스며들게 된다.
기회를 만들어 만나게 된 처형에게 부탁한 일이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 지금 자신이 흠뻑 빠져있는 금단과 예술의 경계에 도취되어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렇게 자신의 걸작을 만든 다음날, 동생을 걱정하는 아내와의 조우에서 미쳐버린 세 사람만이 적막으로 모든 것을 대변한다.
(영혜의 언니)
자신을 망가뜨린 혈육을 찾아가는 길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내는 것이 장녀의 몫이고, 혈육에 대한 최선이다. 그래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채식주의자 선언과 동시에 가해진 아버지의 폭력에 기꺼이 맞서는 동생에게서, 평생토록 느껴보지 못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당연하게 느꼈던 폭력이 이 아이에게는 자신의 인색을 잠식시킬 정도의 아픔이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니, 영혜야.
이미 미쳐버린 동생을 겁탈한 남편은 언제부터 미치고 있었을까. 사실 자신이 제일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상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손으로 지켜내야 할 것들의 무게가 다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가게일에 힘을 쓰면서 동생을 정신병원에 책임지고 보내는 일.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그저 안도할 뿐, 이렇게 병원에서 동생의 일로 방문을 요할 때의 불안감은 인혜의 정신을 더욱 혼미하게 만든다. 아들이 보고 싶다는 전남편의 연락을 무시한다. 그럴 가치조차 없다.
먹지 않아 삐쩍 마른 동생이 물구나무를 선다. 자신은 나무가 되고 싶단다.
왜라고 물을 기력조차 없다. 그저 동생이 살았으면 좋겠다. 자신조차도 힘든 현실에 그저 버티고 살고 있지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가정이 망가지고, 부모님은 충격으로 쓰러지고. 또 아이는 불안해한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영혜야. 언니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나무가 될 수 없어. 사람으로서는 살 수 없는 거니.
인간 영혜에 대한 주변인들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야기가 기괴하고 풍성하다.
평범한 사람이었고, 특출 나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다.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아픔을 곱게 삼켜가며 살아오는 듯한 여자 영혜는 괜찮아 보였지만 괜찮지 않은 사람이었다. 억압하는 아버지에게서, 잔인한 문화임에도 그러려니 했던 관습 안에서, 평온함 속에서도 영혜는 괜찮은 척했을 뿐이지, 진짜 괜찮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다 자라 성인이 된 영혜를 잠식시킨다. 누구도 그녀를 위로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존재자체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의 입과 눈, 손짓과 발짓, 표정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영혜의 말이 맞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젖가슴이 좋아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몸짓 하나, 눈초리에도 상처받는 이들이 분명 있을 수 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보다, 누구도 해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영혜는 겉으로 보기에는 채식주의자였다.
하지만 먹는 행위 자체가 모든 살아있는 생물을 해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무가 되고 싶었나. 나무는 그늘이 되어주기도, 열매를 맺어 살아가는 생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또 가공되어 목재로, 펄프로 인간들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준다.
나무가 뿜어내는 공기로 정화까지 시켜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하지만 인간은 나무가 될 수 없다.
그저 죽음만이 그녀의 바람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생을 함께하자 약속했던 사람이 자신을 버려도, 완전한 타인이지만 혈연과의 결혼으로 가족이 된 형부와의 관계에도 영혜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영혜는 언제부터 자신을 포기했을까.
우리는 영혜 자신과 대화해보지 않았기에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
어릴 적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폭력과 덤덤히 받아들였던 가족들의 모습에서 좌절했을까.
그저 자신의 욕구충족에 만족했던 남편의 모습에서 인간에 대해 실망했을까.
처제에게 예술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누드화를 제의했던 형부에게서 인간혐오를 느꼈을까.
부적절한 형부와의 관계에서 화를 내지 않는 언니에게서 자기혐오를 떠올렸을까.
간단하지만 심오한 영혜의 마음을 어느새 공감하게 된다.
왜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을까. 그저 가만히 두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을.
불편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의 편안함을 바라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인내로 표현한다.
여기서 솔직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오직 영혜 한 사람뿐이다.
위선자. 그녀가 내뱉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상대방에게 상처주기 싫어 자신이 마냥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영혜의 마음이 갸륵하다.
채식주의자는 그저 허울뿐인 말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자신을 위한 방패막.
이해하지 못하면 비난이라도 하지 말자.
상처받기 싫다면 수긍이라도 해주자.
또 다른 영혜는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내 마음 안에도 영혜는 살아있다. 상처받기 싫고, 상처주기 싫은 가련한 영혼이 나에게도 존재한다.
나는 그런 나의 마음을 글에 담는다. 정제하고, 때론 소망을 담아 누군가의 공감을 받고자 하는 바람을 담아 배설한다. 나의 영혜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생각과 눈초리와 마음을 담는다.
소화하고 배설하는 각자의 방법으로 알려주면서 나의 영혜를 보듬어 나가야지.
나는 될 수 없는 채식주의자, 그래도 나는 영혜를 포기하지 않는다.
한강 작가님의 필력에 또다시 감탄하며 책을 덮는 마음이 포근하다.
마치 다가올 서늘한 겨울바람 안에서 먹는 뜨끈한 오뎅국물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이 계절에 읽기 좋은 책, [채식주의자]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