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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은 영화 여행기
by 포카텔로 Feb 12. 2017

8월의 크리스마스,  첫 번째

전라북도 군산시

첫눈이 내리는 날, 우리 그곳에서 다시 만나     


많은 연인들의 입 속에 맴돌았던 그 말, 예전에 연인에게 속삭였었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12월의 첫날, 차창은 몰아치는 눈보라로 희뿌옇게 보였다. 잠시 창에 기대 눈을 붙였다.     

 

“군산에 도착했습니다. 승객들께서는 내리면서 빠지는 물건이 없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초원사진관에 사진기는 없지만 편지를 보낼 수 있다(사진=포카텔로)

도착한 군산터미널은 눈이 그쳐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날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갔다. 한 10분쯤 걸었을 때 과일가게의 귤을 보았다. 겨울이었지만 눈에 띄던 주황빛 귤은 시트러스 향을 한껏 내뿜고 있었다. 정원이 다림에게 줬던 귤도 싱그러운 그들의 사랑과 닮아있었다. 인심 좋은 사장님에게 얻은 귤 하나를 먹으며 초원사진관으로 향했다. 수많은 멜로 영화들이 나왔지만 아직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보다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없다. 마치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처럼 길 위에 뿌려진 아련함을 담아갔다.  

  

둘의 향기가 오롯이 새겨진 내부(사진=포카텔로)

군산이 대학생들의 내일로 성지가 되고, TV 프로그램에 모습을 비추면서 방학만 되면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이야기에 여행을 포기했었다. 조용하고 사색하는 분위기를 선호하는 탓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며 풍경에 집중하기 힘들다. 다행히도 대학교 2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던 터라 그 날은 사람들이 없었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한적함을 오롯이 느끼다 보니 ‘초원사진관’ 다섯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 전에 도착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고 사진관의 미닫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밥 때여서 사진관을 관리하는 공무원도 자리를 비운 듯했다. 문을 열고 펼쳐진 광경은 영화 속 모습 그대로였다. 한석규가 맡았던 주인공 정원의 분신과도 같은 초원사진관은 그의 성격처럼 소박하지만 반듯하게 꾸며져 있었다. 오래된 신도리코 복사기, 단종된 파란색 신일 선풍기, 낡은 자개장, 코닥 필름 카메라, 다림을 바라보던 창문까지 추억은 스크린을 넘어 눈앞에 서있었다.      


소파에 앉아 내부를 둘러보던 중 한 곳에서 눈길이 멈췄다. 영화 속 장면이 찍힌 흑백, 컬러 사진이었다.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 정원의 영정사진이 된 흑백사진과 눈 쌓인 사진관을 지나는 다림의 모습이 나온다. 


“내 기억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언젠가 당신 기억 속에 누군가 떠오른다면 그게 나이길 바랍니다 (사진출처 = 네이버 '8월의 크리스마스)


나직이 속삭이는 한석규의 내레이션과 장면. 정원의 마지막 사진은 1998년 12월 25일 그날로 나를 끌어가고 있었다. 벽면의 사진들은 크게 두 개로 구분돼 있었다. 영원히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을 기억처럼 자신의 과거 사진들은 흑백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끝을 함께한 다림의 사진은 선명한 원색으로 남았다.       


초원사진관 내부에는 영화 속 소품들이, 바깥에는 주차단속요원이었던 다림의 단속차량이 있다. 점심을 먹고 나온 오후는 바람이 잦아들어 조금 따뜻했고 다림의 티코 옆에 있던 벤치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나무, 비 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고 가던 골목, 처음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담장... 영화를 보면서 눈에 익었던 모든 공간이 신흥동 골목 곳곳에 남아있는 것을 느꼈다. 눈발이 그치고 걸음을 옮겨 서초등학교와 해망굴을 향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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