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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은 영화 여행기
by 포카텔로 Feb 18. 2017

8월의 크리스마스, 두 번째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굴로 향하는 길에 하늘 높이 솟은 표지판이 있었다. 


'신흥동 근대 가옥 방향' 


군산 여행을 위해 찾아봤던 여행 책자에서 초원사진관이 있는 신흥동에 다른 영화 촬영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신흥동 근대 가옥으로 부르지만 예전에는 영화에 따라 '하야시 저택', '평경장 집'으로 불렸다. 『장군의 아들』에서는 김두한의 라이벌 하야시의 근거지로 나왔고, 『타짜』에서는 고니의 화투 스승인 평경장의 저택으로 나온다. 원래는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방문했을 무렵에는 저택의 정원과 건물 바깥쪽에서만 관람할 수 있었다. 온전한 보전을 위한 조치였다. 터미널에서 걸어오면 주민센터 부근에 '항도장 여관' 간판이 보인다. 간판 근처의 이정표를 중심으로 신흥동 근대 가옥과 초원사진관으로 가는 길이 나뉘어 있다. 


집을 나와 목적지를 향해 갔다. 초원사진관에서는 5분에서 7분 정도, 신흥동 근대 가옥에서는 10분 거리에 군산 서초등학교가 있고 거기서 5분 정도 더 걸으면 월명공원과 해망굴에 닿을 수 있다. 서초등학교는 영화의 초반과 중반부의 데이트 장면, 마지막에 세 번 나오는 곳으로 운동장이 모두 이 곳에서 촬영됐다.



정원은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사진=네이버 영화)

가슴속 한편에 혼자 쉴 수 있는 그루터기가 있듯이 정원은 운동장에서 사색에 잠기고 추억을 떠올렸다.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그리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방학을 한 운동장은 한산했다.(사진=포카텔로)

운동장은 정원이 살아온 풍경과 닮아있었다. 다림과 함께 달리며 행복한 삶의 순간을 채워 넣는 장소이자,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돌이켜 보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곳.  추억의 공간에서 추억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은 정해진 시간 동안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을 것이다.   


운동장은 방학이 시작되고 나서 인지 아이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강아지와 산책하는 어르신 한분만이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낯선 총각을 본 어르신은 ‘서초(등학교) 출신이냐’며 물어왔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며 동네와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월명공원의 벤치(사진=포카텔로)

운동장에서 5분 거리에 야트막한 산이 있고 월명공원과 해망굴에 도착했다. 주차단속요원이었던 다림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불법주차라는 개념이 희미했던 당시에 단속요원들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다 쫓겨난 다림은 월명공원 근처 벤치에서 햄버거를 먹다 정원을 만나게 된다. 오고 가는 평범한 안부에서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정동진 역의 고현정 벤치처럼 특이한 점도, 남이섬 겨울연가 벤치처럼 커다란 해설문이 있지 않지만 조용히 나무 아래서 장면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그들처럼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남은 이에게 슬픔을 남기지 않는 것, 정원이 다림에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려였을 것이다(사진=네이버영화) 

공원 아래의 해망굴을 보고 터미널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정이 마치기 무섭게 겨울의 눈보라가 몰려왔고 지나가다 근처의 찻집에 들어갔다. 


정원이 다림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연락을 피하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찻집에서 창밖의 그녀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대추차가 담긴 찻잔을 쥐고서 눈보라 치는 창을 보았다. ‘사랑하기에 떠나보낸다’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이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떠나기도 한다. 남은 이에게 슬픔을 남기지 않는 것...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배려가 아니었을까. 서울에 가는 버스에서도 눈은 계속해 내리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12월의 크리스마스와 하얀 눈을 보고 싶어 했을 그를 떠올리며 군산 여행을 마무리했다. 엔딩에서 웃던 다림의 미소처럼 정원도 어딘가에서 12월을 생각하며 웃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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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음악, 영화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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