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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카텔로 Sep 13. 2020

밥심과 탄수화물 중독

그 많던 탄수화물은 내가 먹었구나

"밥 먹고 힘내서 일 합시다"


직장에서 상사들이 지친 부하직원들을 독려할 때 가끔 이런 말을 한다. 그러고선 메뉴를 고를 때 항상 자신이 좋아하는 걸로 통일하길 원한다. 중국집에서 자장면으로 주문을 맞춘다거나 백반집에서 김치찌개로 통일하던지 뭐 그런 식이다. 그렇게 먹은 식사는 힘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탄수화물이니 1g당 4kcal의 에너지를 낼 것이다. 실제 몸에서 그러한 작용이 있더라도 내가 느낄 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기분 탓'에 영향을 많이 받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나 유럽 학자들이 찍은 조선인들의 사진을 보면 대접만 한 밥공기에 보리밥을 고봉으로 쌓아놓고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전부터 우리에겐 '밥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밥이 에너지의 원천이다'라는 생각이 깊게 자리 잡혀있다. 하루 종일 면을 먹은 다음 날에 밥이 당긴다던지, 외국여행을 다녀온 후 공항에서 된장찌개를 시켜먹는 모습은 우리 민족에 대한 밥 사랑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사람들은 힘이 안 날 때 밥을 먹으면 생기가 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밥은 정말 우리를 힘내게 할까?


영화 <관상> 스틸컷


결론부터 말하면 밥은 소화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만들고 몸을 움직이게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쌀도 탄수화물이기 때문에 당으로 분해되고 몸에 소화·흡수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생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운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 연장에 필요한 밥 이상을 섭취한다. 어느 순간 탄수화물을 식탁을 뒤덮다 못해 넘쳐나기 시작했다. 먹을게 부족했던 과거와 달리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는 세상이지만 삼시세끼 탄수화물을 빼먹지 않고 식탁에 올린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탄수화물에 중독된 걸까?



탄수화물뿐만 아니라 고기와 같은 단백질과 지방도 에너지를 낸다. 문화권에 따라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곳도 많다. 채소를  거의 접할 수 없었던 과거 이누이트 족은 동물성 단백질을 주로 섭취했다. 물론 여러 가지 질환에 취약하거나 균형 잡힌 식단이 아니어서 발생한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생존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이어트를 할 때도 다섯 가지 흰 것(설탕, 소금, 쌀, 밀, 조미료 등)을 적게 먹거나 섭취하지 말라고 권장한다. TV에 나오는 많은 연예인이 그 5가지를 끊고도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탄수화물에 집착하는 걸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예전에 한 방송에서 봤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탄수화물과 밥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탄수화물 말고 다른 거 먹으면 안 되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를 보면 인류의 종말과 곡식의 미래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20세기에 범한 여러 잘못으로 인해 기후와 토양이 변하면서 인류가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의 개수가 점점 줄고 있었다. 21세기 인류는 생존을 위해 그나마 땅에서 자라는 몇 안 되는 곡물을 기르지만 이 역시 그 가짓수가 점점 줄면서 위험에 처한다. 새로운 지구, 새로운 터전을 향해 나간다는 내용이 작품의 주된 스토리다. 


밀과 쌀, 조와 수수, 그 이후엔 옥수수를 키우는 인류의 모습이 나온다. 주인공 쿠퍼(매튜 맥커니히)도 교외에서 거대한 옥수수밭을 경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옥수수가 잘 자라지 않게 되고 식량을 공급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얼마 전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미처 하지 못한 생각이 들었다. '작물을 재배할 수 없으면 단백질을 섭취하면 되잖아?', '더군다나 메뚜기가 많다고 하던데 그걸 식량으로 활용할 생각은 못한 건가?'라는 얄팍한 물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물론 영화에서 곡식을 키울 수 없다는 얘기는 생태계 자체가 파괴됐다는 말로 해석하는 게 현명할 것이다. 자연의 체계가 무너졌으니 먹을 거 자체가 없어야 하지만 작품 속의 세상은 그럭저럭 먹을 게 있어 보인다. 다른 먹거리를 찾아도 되건만 사람들은 곡식을 생산하는데 집착한다. 영화 끝부분에서 인류는 우주에서도 곡식을 키울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곧 죽어도 먹을 건 탄수화물밖에 없는 듯이 보인다.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옥수수밭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우리가 탄수화물에 중독됐다면?


며칠 전 TV에서 방영한 '알쓸신잡'을 유튜브에서 봤다. 수년 전에 방송한 내용이지만 정보와 학술적 가치가 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두고 보는 스테디셀러 영상이었다. 술과 탄수화물을 주제로 이야기한 콘텐츠에서 유시민 작가는 "저는 파스타가 맛있긴 한데... 사실 파스타나 피자 모두 탄수화물을 어떻게든 먹기 위해 만든 음식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농업혁명 이후 탄수화물(곡식)이 남아돌자 이를 처리해야 했고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게 탄수화물밖에 없었다.

농업 혁명 이전,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기의 인류의 탄수화물 섭취량은 그 이후보다 현저히 적었다. 

하지만 곡물을 매번 같은 방식으로 먹는 건 고역이었다. 그래서 이를 활용해 무치고 굽고 볶고 비비고 뿌려가며 새로운 요리를 만들었다.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과 추론이었지만 꽤나 흥미롭게 들렸다. 


이어 김상욱 교수는 "초기의 밀과 쌀은 지금과 품종이 달라서 영양이 많이 부족했다. 그 쌀과 밀만으로는 충분한 영양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이 부분이 고고학의 미스터리인데 일부 학자는 인류가 탄수화물에 중독돼서 끊임없이 재배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라고 지적했다. 


김영하 작가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최근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며 "인류가 곡식을 심어 최초로 만든 음식물은 술(맥주)이었다. 고대인들은 '술을 먹기 위해서는 꾸준히 곡식을 심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곡물에 중독됐든, 술에 중독됐든 우리는 탄수화물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먹을게 넘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밥이나 빵, 면요리 없이 식사하는 걸 상상하기 힘들다. 갈비나 삼겹살을 먹으러 식당에 가서도 "여기 밥 한 공기 주세요"라며 탄수화물을 챙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지 않은가. 


술에 대한 김 작가의 말도 꽤나 재밌었다. 상하수도 시설이 잘 갖춰진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맹물을 먹고 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전염병도 물에 의해 전파되는 수인성 질병이 많았기에 정제해서 먹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남는 곡식을 쓰면서 물을 안전하게(술을 만들 때는 재료와 물을 기본적으로 끓이는 과정을 거친다) 마실 수 있는 '술'을 만드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도, 앞으로도 탄수화물을 먹을 겁니다


우리가 탄수화물을 좋아하게 된 건 한 가지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남는 식량을 썩혀서는 안 되었고 질병에서도 벗어나야 했다.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질리도록 먹었을 탄수화물, 그렇지만 매번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버티는 것은 쉽지 않았을 거다. 같은 재료로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과 같은 다양한 음식들이 태어났다. 중독된 것치고는 꽤 괜찮은 결과인 셈이다. 


다시 돌아와서 '밥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이렇게 곡물을 많이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 조상들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탄수화물을 먹도록 연구했다. 밥을 양념에 비벼먹기도 하고, 곡물가루를 이용해 전을 부쳐먹기도 했다. 쌀로 막걸리를 만들었고 여러 가지 곡물을 한데 섞어 잡곡밥을 지었다. 하지만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기에 물리기 쉬웠다. 특히 반찬이 몇 개 없는 시절에는 밥을 더 많이 먹었다. 더 많이 먹고 더 쉽게 질리는 패턴이 반복된 것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의식적으로 밥을 먹도록 만든 그 생각.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맨 처음 '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라고 생각한 이 역시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기왕 먹을 거 힘이 난다고 여기면 기분도 좋고 왠지 없던 에너지가 생기는 기분이 드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밥을 많이 먹어야만 힘을 내서 일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고 다녔고 많은 이가 공감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밥을 많이 먹으니 기운이 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밥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존재로 자리 잡은 건 아닐까?




영화 <에일리언:커버넌트> 스틸컷


무엇이든 중독되면 끊는 게 쉽지 않다. 사랑도, 마약도, 습관 같은 모든 중독되는 것들은 지리멸렬하게 사람을 붙들고 늘어지는 성질이 있어 떨쳐내는 게 어렵다. 사람들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줄곧 곡식을 먹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곡물의 수가 점점 줄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탄수화물을 매일, 그것도 많이 먹는다. 


우리가 개미핥기가 개미를 먹는 모습을 보고 이름을 지었듯이 외계인이 인류를 본다면 '탄수화물 먹는 영장류'나 '탄수화물 퍼먹기'라고 우리 종을 부를 수도 있다. 그만큼 우리는 탄수화물에 의존하지만 지금까지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영화 <에일리언 : 커버넌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낯선 행성에 도착한 우주 비행사들은 들판에 자라는 밀을 보고 고향에 온듯한 느낌을 받는다.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라는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탄수화물에 중독된 유전자가 자기도 모르게 반응한 것일까. 인류는 자신이 키우던 곡식에 중독됐고 곡물 없는 삶을 꿈꿀 수 없게 됐다. 여러 영화에서 나왔던 것처럼 우리가 지구를 떠나야 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탄수화물을 먹을 수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글을 쓰면서 '오늘 한 끼쯤은 탄수화물 없이 식단을 꾸려봐야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카페에서 나는 빵 굽는 냄새에 나도 모르게 반응하고 있다. 커피 한잔과 모카번을 먹고 집에 가는 길에 또 밥을 먹었다. 역시 탄수화물에 중독된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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