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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카텔로 Jun 14. 2022

합법적인 외계인의 생존법

이방인

과거에는 로빈슨 크루소로 외딴곳에 조난된 이를 설명했었는데, 요즘 글이나 영상들에서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와 배구공 친구 윌슨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려고 하는데 어때?"


"캐스트 어웨이 개봉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걸 예시로 쓰네. 너도 옛날 사람이야."    


'밀레니엄'이라는 단어가 낯설어진 요즘, 20년도 넘은 작품을 들고 예시를 드는 걸 보고 혼자 웃었다. '작품 리스트 업데이트해야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본 작품 중 어떤 영화가 있을지 고민했다.     

 

그래비티? 산드라 블록이 경험한, 목숨을 걸 정도로 극한의 공포는 아니니까 패스.

터널? 하정우처럼 터널에서 오줌을 마실 정도는 아니니까 다른 작품으로.

컨저링? 아직 내 집이 아니니까 언제든지 귀신 들린 집을 떠날 수 있으니 아니고.     


이하 출처 : 언스플래시


그 순간 감자조림을 해 먹으려고 껍질을 벗기던 강원도 감자 한 알이 눈에 들어왔다. 이 무슨 빌드업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글의 소재를 찾는 경우 적당히 이어지는 인과관계에서 무언가를 끌어낼 때가 많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화성에서 감자 농사짓는 맷 데이먼을 떠올렸고, 그런 김에 감자조림을 만들었다.     

 

영화 <마션>, 화성인은 다른 생존영화에 비해 밝다. 극한의 공포와 목숨을 건 사투가 작품에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시종일관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화성의 주황빛 사막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둠’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공포는 적다.     


낯선 화성에서 생존하게 된 지구인 마크는 모든 지구인으로부터 ‘화성인’으로 기억되고 불린다. 그 누구보다 화성을 벗어나 지구로 가고 싶어 하는 한 남자는 역설적이게도 그곳을 대표하는 이가 되었다. 내 상황도 비슷하다. 강릉이라는 도시가 매력적이고 마음만 먹으면 살기에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평생 살 곳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스친 뒤부터 '언젠가는 떠나야지'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강릉사람'으로, 여기서는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 불린다.   


이곳에서 나는 현지인들에게 외지인, 이방인이다. 영화 <곡성>의 외지인이 느꼈을 차가운 눈빛과 천대는 없어도 무관심과 냉대는 존재한다.     


호기심도 관심도 없는 상태. 투명인간이 된 외계인처럼 그들에게 보인 걸까. 위협적인 존재로 보진 않지만 '우리 고향에 오랫동안 있을 거 같지 않은', '기회 되면 떠날' 사람으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타지인이 아닌 이 동네 사람이 되길 원했다.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 처음 이곳에 온 게 청년마을 지원사업이어서 그런지 그로 인한 인간관계가 이 지역 인맥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다가 모종의 이유로 그 관계가 모두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다.  

    

인간관계가 무너지자 생활의 한 축이 무너져버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어차피 일하려고 남은 건데'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딜 가나 만나는 게 사람이고, 다 사람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법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싶었지만 이미 상해버린 귤처럼 마음은 까맣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모임을 나가서 취미를 함께 즐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사는 데 있어 사람은 중요하다. 지금까지 여러 번 이직과 퇴사를 하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게 다 사람 때문이었다. 새로운 지역에 가서 정착하는데도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일하려고 왔지, 사람 만나려고 왔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살 수 있을 때 존재가치가 있다. 태초의 단군신화에서도 곰과 호랑이가 한 동굴에서 살았기 때문에 100일을 견딘 게 아닐까. 중간에 나온 호랑이는 친구 소식에 그리워서 나온 거고.     


다시 한번 느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대화를 하고 일상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금 내 상태는 마치 가수 스팅이 부른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에 나오는 합법적인 이방인(legal alien)과 같다. 회사에서 요청해 강원도로 이사를 와서 주소상으로도 강원도민이고, 회사와 거주 공간 모두 강릉에 살고 있어 강릉시민이지만, 마음은 이곳에 정착하고 있지 못하다. 저 멀리 프록시마 센터 우리를 그리워하는 외계인처럼, 영화 <디스트릭트 9>에서 지구를 떠나려고 하는 비커스처럼 저 멀리 닿지 않을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 적응할 수 있을까. 아직까진 모르겠다. 그 누구의 관심도, 따뜻한 말 한마디도 받기 힘들어서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이곳을 밀어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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