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 volas interparoli

우리는 대화하기를 원한다. 아니... 대화해야만 한다!

by 김틈


Heardability와 민주주의


인간 생명이 시작될 때 가장 먼저 생기는 소통을 위한 능력은 '청각'이다. 인간의 생명이 저무는 순간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능력도 '청각'이라고 한다. 듣는 능력을 가장 처음부터 가장 나중까지 인간에게 준 섭리, 신의 이유, 과학의 근거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듣기'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화와 소통을 통해 한 개체가 아니라 집단의 힘을 만들어냈고 키웠다. 국가와 국가 간 연합까지 커진 힘은 인류 자체의 종속과 지구별의 존재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강해졌다. 그 모든 원천은 인간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듣고 있을까? 제대로 소통할 수 있을까? 듣기는 퇴화당하고 말하기만 강요당하는 시끄러운 적막의 난청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듣기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


김도연청진기.jpg (사진 : 김틈-2013년 딸과의 한 순간, 아빠 배 속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렸을까?)


눈에는 있지만 귀에는 없는 '꺼풀'


듣기는 소통의 본질이면서도 훨씬 자유롭다. 운전을 할 때, 자전거를 탈 때, 음식을 만들거나 놀이를 하면서도 가볍게 경청(輕聽)한다. 또 불경이나 찬송, 혹은 첨예한 아침 시사 프로그램의 발언을 귀 기울여 경청(傾聽) 하기도 한다. 둘 다를 동시에 할 수도 있다. ‘눈꺼풀은 있어도 귀 꺼풀은 없다.’는 광고계의 잠언처럼 귀는 내가 여닫을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하고 공존하고 병행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췄다. 어쩌면 인간의 존재와 관계도 그런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


소리를 다루는 라디오 PD들은 항상 듣는 사람, 청취자의 상황을 생각한다.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도 다른 일을 동시에 하는, ‘이중시간의 창출’의 목적에 맞도록 적정한 스토리의 강약과, 리듬을 고려한다. 꼭 물리적 시간과 청취행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거대한 사회적 슬픔과 분노에 빠진 청취자들에게 지상 최고의 코미디나 흥겨운 음악을 신의 경지 수준으로 만들어 들려준 들... 청취자들은 당황스러울 뿐 감탄하지 않는다. 동행할 때 동행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을 쉽게 말해 '듣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SNS와 스마트폰을 통해 집중해서 마주 보게 하는 미디어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향을 따라 함께 동행하는 라디오는 '마음'이라는 추상적 실체와 가장 가까운 미디어다.


듣기 평가의 추억


대입 시험을 위해 비행기 운항이 중지되는 나라. 늘 수능시험일에 보도되는 기사 제목이었다. 아이들의 시험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단 사회 전체의 다소 극성스러운 배려가 아니다. 듣기 시험이 포함된 수능의 특성상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도록 그날 듣기 평가 시간엔 비행기가 날아오르거나 착륙하지 못한다.

대입에 모든 가족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슬픈 현실은 둘째 치고... 인생의 중요한 시험에서 듣는 능력을 위해 세상 전체가 고요하려 노력하는 모습은 지금의 세상과는 너무 다른 아이러니다. 승패의 이분법으로 치열하게 갈려진 세상에서 듣기, 듣는 사람이란 희박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세워놓고 승패를 가늠해 보라 하자. 대화의 맥락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듣고 있는 자를 패자로 꼽기 십상이다. 패자가 되기 싫어서 듣기도 전에 들리지도 않을 말들을 거칠게 던지는 이유. 유튜브엔 귀와 마음이 먹을 정도로 볼륨을 높인 혐오와 차별의 말들이 가득하다. 그 조각난 날카로운 말의 투석전은 아이들의 유튜브와 뉴스화면까지 모든 '듣기'를 무릎 꿇린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에서 듣기 능력을 위해 공항까지 멈추는 나라의 아이러니.


그러므로 듣기를 핵심으로 두는 소통은 기본적으로 첨예한 권력관계다. 최고 권력자의 말, 정확히는 '발음'을 놓고 전 국민도 듣기 평가를 하는 웃지 못할 논란을 만들어졌다. 역설적이게도 권력자의 듣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전 국민에게 드러낸 촌극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전세사기와 이태원참사, 세월호, 의문사, 여러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듣는 능력은 그 사회의 민주주의와 통합된 힘을 상징한다.

한 언론학자가 말한 Heardability(들을 가능성, 듣는 능력)라는 개념처럼 듣는 능력, 들을 가능성이 낮은 사회는 민주주의가 망가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 우리가 선거 때마다 권력자를 선택할 때 그의 듣는 능력을 우리부터 평가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Ni Volas Interparoli(우리는 대화하기를 원한다), 대화해야 한다.


에스페란토의 깃발-녹성기.jpg (에스페란토의 깃발 - 녹성기)


폴란드의 안과의사 자멘호프가 만든 세계 공용어 에스페란토어는 시대를 앞서가는 아티스트 윤상의 곡 제목이기도 하다. Ni volas Interparoli. 우리는 대화하기를 원한다...라는 말은 '내 말을 좀 들어봐 봐'라는 뜻이 아니다. 당신이 궁금하고 그렇게 나눈 우리의 이야기가 익숙한 새로움을 찾아내길 바란다는 뜻이다. 대화는 말하기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와 말하기의 순환인 것. 그 끝에 다다를 공감의 마음이다.


그래서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던 시기 세계의 원활한 소통을 희망하며 1887년에 만든 이 에스페란토어를 쓰자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숙청을 당한다(박헌영 등). 소통을 싫어하는 그 저의를 알아차리는 것도 소통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다.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하는 갓난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안에 모양과 높낮이와 강약이 있다. 그것 조차도 말이다. 그 말부터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고운 노래였던 그 말이 투정이 되고 싸움이 되더라도 그걸 들어주었던 기억과 마음을 되돌려 준다면... 그 아이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대화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대화하기를 원한다. 들을 수 있다면 반드시 이해할 수 있고...

끝끝내 다시, 서로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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