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 사람들②] 도서 <시드볼트>저자 야생식물종자연구실 나채선 실장
지난 수목원 사람들 1편 에서는 지구의 대재앙을 대비해 야생식물 종자를 영구 보존하는 우리나라 시드볼트의 김진기 대리를 만나 시드볼트의 전반적인 운영과 종자 입고 과정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도서 <시드볼트>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또 하나의 주제는 야생식물 종자 연구에 관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시드볼트에 저장되는 종자는 앞으로 50년 뒤에 나올지, 100년 뒤에 나올지 알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들어간 종자가 밖으로 나올 때는 그 식물이 지구 상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마지막 남은 이 종자가 무사히 싹을 틔운다면 인류는 그 식물을 다시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제 그 식물은 멸종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시드볼트 안에 들어 있는 이 종자가 여전히 살아 있고, 다시 싹을 틔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 근거를 마련하고, 시드볼트 안에 들어 있는 종자의 신뢰성을 담보하기 위해 백두대간수목원에서는 야생식물종자연구실(이하 연구실)을 두어 야생식물 종자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실에서는 시드볼트를 중심으로 한 종자 복원 연구는 물론, 야생식물 종자 활용을 비롯해, 산업화, 종자 주권 확보 등 야생식물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룬다.
이와 관련해 <시드볼트 – 지구의 재앙을 대비하는 공간과 사람들>의 저자 중 한 명이자, 야생식물종자연구실의 전체 과정을 지휘하고, 통제하고, 조율하는 나채선 실장을 만났다.
"배운 것을 한국에서 써먹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 오스트리아에서 종자 연구를 하다가 한국으로 왔다. 계속 거기 있었으면 대우 같은 측면에서 좀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한국에 오게 되었나?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종자 관련 실험실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것도, 종자와 관련해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던 것도 늘 종자 연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좋은 기회가 생겨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오가면서 종자를 생리학적으로 파고드는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때도 마음 한편으론 이렇게 배운 것을 언젠가 한국에서 써먹어야지 하고 생각했다.(웃음)
그러다 우리나라 백두대간수목원에 시드볼트가 만들어지고, 동시에 야생식물 종자 연구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곳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일말의 고민 없이 지원했다. 물론 오스트리아에서 계속 연구를 했다면 그 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었겠지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다는 건 여전히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 현재 연구실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고 있나?
연구실에서는 종자 수집부터 시드뱅크 운영, 종자 연구까지 두루 다루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일을 하고 있다.
- 백두대간수목원에 시드볼트가 있는데, 연구실에서 시드뱅크를 또 운영하고 있다. 굳이 시드볼트와 시드뱅크가 둘 다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어디 가서 '직장' 소개할 때 가장 자랑하는 부분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백두대간수목원은 시드볼트와 시드뱅크를 다 가지고 있는 전 세계 유일한 기관이다. 시드볼트에 한 번 들어간 종자는 정말 위기의 순간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하지만 시드뱅크에 있는 종자는 수시로 꺼내서 활용하고 연구할 수 있다.
그 외의 온도나 습도 등의 조건은 완전히 같다. 그래서 종자를 수집하면 보통 시드볼트와 시드뱅크에 중복 보존한다. 이후 시드뱅크에 있는 종자를 가지고 다양하게 연구하면서 결과를 도출해 낸다. 이 연구들은 훗날 시드볼트가 열렸을 때 요긴하게 활용된다. 결과적으로 시드뱅크로 인해 시드볼트를 더 안전하게 운영하는 셈이다.
-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이를테면 시드볼트에 있는 종자가 오십 년쯤 뒤에 어떤 사정으로 인해 밖으로 나왔다고 치자.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도 종자가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우리가 연구하는 분야 중에 저장 특성과 저장 수명이 있다. 시드볼트나 시드뱅크에 저장하려면 영하 20도의 온도에 저장이 가능한 종자여야 한다. 그래서 어떤 종자가 있다면 과연 저장해도 괜찮은지, 저장이 안 된다면 왜 안 되는지, 그럼 안 되는 것들은 어떻게 하면 저장이 가능할지, 저장이 가능한 종자라면 몇 년까지 저장할 수 있는지 등을 연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밤나무나 참나무 열매 같은 경우는 건조시키는 순간 죽어 버리기 때문에 저장이 불가능하고, 소나무는 대략 200년 정도 저장이 가능하지만, 발아율은 50%까지 떨어진다. 그 이후 시드뱅크에 있는 종자를 가지고 5년 정도마다 꺼내서 예측과 맞는지 검증하는 식이다. 이 실험을 통해 결국 지금 시드볼트에 있는 소나무 종자도 대략 발아율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연구 덕분에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적의 종자 파종 시기 설정"
-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종자가 싹을 틔우려면 어떤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가? 그냥 흙에 심으면 되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 지점이 야생식물 종자 연구가 작물 종자에 비해 어려운 부분인데, 자연 상태에서 살아남은 종자들은 각기 다른 휴면 특성이 있다. 유형에 따라 조건이 다 다르고, 그 조건을 만족해야만 싹을 틔운다. 이렇게 휴면 중인 종자를 깨워 싹을 틔우는 방법에 대한 것을 휴면 타파 연구라고 한다.
작년에 연구실에서 논문을 발표한 것이 있는데, 낙지다리, 꼬리풀 같은 희귀식물의 휴면유형에 관한 논문이었다. 어떤 것은 저온처리를 해야 깨어나고, 또 어떤 것은 특정한 호르몬 처리가 필요한 것도 있다. 좀 쉬운 것 중에 콩 같은 종자는 사포 같은 것으로 문질러 딱딱한 표면을 깨뜨리는 것만으로 휴면 타파가 가능한 것도 있고.
- 우리나라에 큰 산불이 발생하면 연구실에서 하는 일이 있을까?
백두대간수목원이 속해 있는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한수정)이 산림복원용 자생식물 공급거점센터로 지정되었다. 복원이 필요한 지역에 자생식물 소재를 공급하는 역할이고, 거기서 백두대간수목원이 공급거점센터의 전체 총괄을 맡고 있다.
보통 한수정에서는 산림청으로부터 어떤 지역에 어떤 식물이 필요하다는 중장기 계획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는 필요한 식물을 수집하는 일, 그 식물이 시드뱅크에 있는 것이라면 증식시켜 필요한 곳에 종자를 가져다 주는 일 등을 하고 있다.
덧붙여, 연구실에서는 그간 발아유효온도와 관련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했다. 종자가 발아할 때 설정한 온도에서 얼마나 잘 자라는지를 실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종자는 17도에서 가장 잘 자라지만 5도 이하에선 발아를 못 하고, B라는 종자는 7도에서 가장 잘 자라는 대신 20도가 넘어가면 발아를 못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C라는 지역에 A와 B를 심어서 산림을 복구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만약 지금이 3월이고 평균 기온이 7~8도 정도라면 우선 B만 심고, 5월쯤에 A를 심으면 당연히 더 잘 자랄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이런 연구 덕분에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적의 종자 파종 시기를 설정할 수 있는 셈이다.
연구실에서 진행하는 연구의 목적은 결국 복원에 있습니다. 저장 특성, 저장 수명, 유전 다양성 등 모든 연구의 이유와 목적은 결국 시드볼트에 저장되어 휴면하고 있는 종자가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문제없이 깨어나 잘 자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야생식물 종자는 그냥 뿌려서 제대로 생장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연구실에서는 이런 다양한 연구를 통해 관련 데이터를 최대한 많이 쌓아놓고 있습니다. 향후 복원이나 재배 때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 <시드볼트> 중에서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이 꿈"
- 실장님의 꿈은 무엇인가?
백두대간수목원의 종자 연구가 우리나라 종자 연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선도기관이 되고, 우리나라 종자 연구가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종자 연구와 관련해서 세계 최고의 기관이라고 한다면 영국의 밀레니엄 시드뱅크를 꼽는데, 수많은 종자 연구자들이 네트워크를 구성해, 서로 왕래하면서 공부하고 배운다. 게다가 밀레니엄 시드뱅크에서는 종자 정보에 관한 기초적인 데이터를 전 세계에 공개하기 때문에 이 사이트를 보면서 연구에 많은 도움을 얻고 자연스럽게 그 위상이 올라간다.
우리나라는 야생식물 종자 연구가 상대적으로 늦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우수한 인력과 최첨단 장비들을 보유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실제로 이제는 많은 나라의 종자 연구자들이 백두대간수목원에 와서 함께 연구하고 교육도 받기 시작했다. 그런 만큼 열심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우리나라 종자 연구 수준이 밀레니엄 시드뱅크를 따라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웃음)"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생각보다 되게 좋은 시설이 있습니다!(웃음) 많이들 알아주시면 좋겠고, 개인적으로는 <시드볼트>라는 이 책을 어린 친구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앞으로 야생식물 종자와 관련한 시장이나 산업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작물 종자에 비해 연구가 많이 되지 않았거니와, 그 종류도, 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복원과 관련한 부분은 투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거다.
그런 점에서 종자 연구는 굉장히 매력적인 분야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종자 연구에 뜻을 두고 진로를 삼는 친구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이왕이면 백두대간수목원으로 오시면 더 좋겠고.(웃음)"
이처럼 다양한 연구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훗날 종자가 필요한 상황이 올 때, 그 종자가 건강하게 살아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시드볼트가 다음 세대를 위한 현세대가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자 빛나는 성취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시드볼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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