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수상록에서 건져 올린 삶의 지혜
<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는 몽테뉴의 수상록(에쎄)을 읽고 쓴 독서에세이다. <에쎄>를 통해 저자가 풀어내는 인생담은 죽음의 공포가 생의 활력을 삼켜버린 일상, 강렬한 고통이 슬픔의 감각마저 마비시킨 삶, 그 어둡고 축축한 터널을 통과해낸 한 인간의 투쟁을 담은 기록같이 느껴진다. 요동치는 운명의 난파선을 타고 거대한 폭풍우를 버텨낸 후 마침내 해안선에 다다른 사람처럼, 초탈한 듯 그녀는 말한다. “고통으로 가득했던 불행의 시간이 결과적으로 나에게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더라.” 녹록지 않았을 시간, 몽테뉴의 <에쎄>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 한 마디를 뱉어낼 수 있는 순간도 오지 않았으리라.
<에쎄>로 이어진 몽테뉴와 저자의 사색은 독자에게 위로를 선사하며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나를 세울 수 있다는 용기를 준다. 삶의 여정 가운데 높은 벽 앞 혹은 낭떠러지 위에 서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글을 꼭꼭 씹어가며 읽어보길 권한다.
살기 위해 우울증 약을 먹었지만 항우울제가 삶의 감각을 마비시켰다는 저자의 회고를 보며 나는 일체감을 느꼈다. 끝도 없이 잠에 빠져들고, 정신이 몽롱하고, 모든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 항우울제의 효과를 나는 약 없이 경험하고 있다. 심지어 기억도 흐릿하다. 어느 날의 시시콜콜한 풍경과 대화를 모두 기억하는 친구를 만나면 나는 번번이 지고 만다. 그가 진실을 왜곡해도 이길 도리가 없다. 어쩌면 이것은 약조차 먹지 않는 몸뚱이의 주인만 믿었다간 죽겠다 싶어서, 무의식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셀프 처방이자 방어기제 인지도 모르겠다. 몽테뉴가 날마다 생각으로 거적을 씌워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조우할 수밖에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몽테뉴의 해법은 성동격서, 36계 줄행랑이었다. “변화는 언제든 괴로움을 덜어주고 풀어주고 흩어준다. 싸워서 괴로움을 이길 수 없다면, 나는 빠져나가며 그것을 피하려고 비켜선다. 나는 계략을 쓴다.” 물론 불행의 완벽한 조건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 우리는 종종 ‘아모르파티(운명을 사랑하라)’의 현신을 목격한다. ‘불행과 행복이 서로 꼬리 물기’하는 운명에 순응하며 불행이 알게 해 준 행복의 가치에 감사하면서도 저자는 말하다. “고통이 나를 성장시키는 거름이라 해도 나는 그것을 기꺼이 청하는 기도는 절대 못 하겠다.” 통렬하고 솔직한 고백이다. 인류를 구원한 예수께서도 일찍이 말씀하시지 않았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고통 속에 있는 타인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을 위로할 때는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려 잠시라도 그 괴로운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신경을 썼다.”몽테뉴의 처방법은 허무해서 웃음이 날 정도다. 하지만 저자는 “원인을 뿌리째 뽑을 재주가 없다고 겸손하게 말할 줄 안다는 것은 몽테뉴 자신이 그 비통함에 대해 잘 알기 때문일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상대가 고마워한 이유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옆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주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한다. 깊은 실의에 빠진 주변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 쩔쩔맸던 내게 저자의 처방은 단비 같은 힌트가 되었다.
죽음은 내가 양상추를 심는 동안에 와주되, 죽음이 왔다고 거리낄 것 없고, 정원이 완성되지 않은 것은 더욱 염두에도 두지 말기를 바란다.”
고통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마주하는 몽테뉴의 자세는 평온하고 아름답다. 몽테뉴의 이 말이 진심 어린 충고로 들렸다는 작가는 다시 우리에게 당부한다. “존재만 하지 말고 살라.”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삶을 탕진하지 말고, 지금을 잘 살아내는 것으로 좋은 죽음을 준비하라고 말이다.
정치 분야에서 일했던 저자는 이기기 위해 자신마저 속이며 상대를 험한 말로 공격하는 동안 자신도 심한 내상을 입었다고 회고한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성공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눈가리개를 한 말처럼 앞으로 내달렸음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거기서 걸음을 멈췄다. 빈껍데기로 살아왔던 저자를 구원해준 것은 영화였다. 영화를 통해 내 가족, 내 이웃의 이야기에 다시금 마음을 열었다. 삶의 중요한 가치들은 범속한 우리들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공에 대한 야망, 권력에 대한 욕망은 ‘절대반지’처럼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위험한 무엇이다. 법관과 시장이라는 공직 경험을 가진 몽테뉴는 “야심가들이 하는 말투로, 우리는 개인을 위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 공공을 위해서 나왔다고 하는 저 훌륭한 말투는 과감하게 흘려듣자.”라고 말한다. 저자는 “시대도 지위도 다른 사람의 글에서 지금과 별 차이 없는, 어떠면 똑같은 시대적 고민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의 욕만 만큼 변하지 않는 것도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몽테뉴는 ‘세상을 정복하는 일’만큼이나 ‘타고난 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에쎄>에 소개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 실천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다. 황제의 직을 던지고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던 자신에게 찾아와 복위를 권하는 사람들에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이 내가 집에 심어놓은 예쁘게 정리된 나무들과 내가 가꾼 듬직한 수박들을 보았더라면, 그렇게 나를 설복하려고 들지 않았을 것이오.”
몽테뉴는 바람직한 욕망의 형상을 ‘한 원을 그리되 좁은 원주’이라고 설명했다. 원이란 어떤 의미인가. 작가는 말한다. ‘원’의 모양은 돌고 돌아 결국 처음의 자리로 돌아오는 초심이다. 각도가 생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방향을 틀어야 하듯 매 순간 자신을 경계하는 자세다. 욕망이 직선으로 치닫는 야심으로 변하지 않도록 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좁은 원주’는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원심력 대신 자신의 내실에 집중하는 단단함을 의미한다.
나는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는 걱정하지만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충족되기를 원한다.”
100세 시대, 은퇴 후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모두의 고민거리다. 두 번째 직업, 새로운 소일거리를 찾을 수 있도록 인생이모작을 지원하는 기관도 있다. 자서전 쓰기 클래스도 많다. 이른 나이에 은퇴한 몽테뉴도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는 힘을 키우게 되었다. 그렇게 20년간 작업한 기록과 사색의 결과물 <에쎄>를 통해, 저자를 비롯한 후대는 인생의 지혜를 엿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마리 준마의 힘은 그 말이 적당할 때에 딱 정지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으로밖에는 더 잘 알아볼 길이 없다. 지각 있는 사람 중에도 줄기차게 말하다가 그만 끊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몽테뉴는 나이 든 사람이 쉽게 범하는 잘못을 이렇게 지적했다. ‘Latte is horse’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는 지난날의 영광을 떠올리며 무용담을 늘어놓는 꼰대, 내려놓는 법을 잊어버린 노욕을 경계했다.
인간 본성의 가장 큰 결함은 우리의 욕망이 끊임없이 다시 젊어지는 일이다. 우리의 지혜와 욕망은 때로는 늙음을 느껴야 한다. 자기 굴에 들어가는 문턱에서 발자국을 지우는 산짐승을 본받아야 한다.”
노인은 많지만 어른이 없는 시대에 주는 몽테뉴의 소중한 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