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기사를 쓰실거면 미리 말씀을 주셨어야지”
취재원과 술잔을 기울이던 중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기획재정부 고위 관료로부터 걸려왔기에 받지 않을 순 없었다. '급하신가보다' 싶었다.
야당의 예산안 삭감을 전면 비판한 정부 부처의 합동 브리핑을, 다시 조목조목 비판한 기사였다. 건조한 팩트를 넘어서는, 특정한 관점을 담은 기사는 언제든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기자로 주관을 섣불리 섞어선 안되겠지만, 민주당이 삭감안을 도출하는 과정과 그 내용도 그리 훌륭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정부 측의 논리도 마뜩찮았다. 그래서 다소 격앙된 목소리의 항의 전화를 받고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조용히 그들의 논리를 듣고, 우리의 논리를 말하고, 소통을 했다.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거다.
그게 12월 2일 밤이었다. 다음날 새벽, 기획재정부가 부리나케 ‘보도설명자료’를 냈을 때도 나는 평온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언설은, 객관보다는 주관의 영역에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MBC 보도에 대한 반박의 근거가 “야당은 구체적 내역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라면 낙제에 가깝다고도 생각했다. 숫자와 데이터 대신 정념으로 하는 반박은 비교적 귀엽다. 다소 건방질 수 있지만 일종의 훈장, 우리 표현으로는 ‘업계 포상’을 하나 쌓았구나 생각하고 웃어넘겼다.
다음 날은 술자리가 서초동에서 있었다. 즐거운 자리였다. 내가 평소 듣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족발과 보쌈을 실컷 채워넣었던 그날 저녁, 갑자기 기류가 이상해졌다. 맥주 한 잔만 더 하자고 들어가려던 호프집이.... 이상하게 고요했다.
곁눈질로 살핀 TV 모니터에는 ‘긴급 계엄’이라는 글자가... 아니 잠깐만. 내가 취했나? 아직 그럴리는 없는데..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 나직하게 욕이 나왔다. "이런 XX, 아 XX....". 술자리에는 현직 법조인들이 몇 있었지만, 그들도 이 사태를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나도 몰라. 사법고시 이후로 계엄이라는 글자는 잊어버렸어."
이런 블랙코미디같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맨정신으로 맥주를 더 마실 순 없었다. '통금'이 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그 자리를 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 인프라를 가진 나라답게, 아직 지하철은 잘 운행되고 있었다. 2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대국민 담화 영상을 봤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예산 폭거’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종북 반국가세력과 예산 폭거가 도대체 어떻게 이어질까? 머리를 핑핑 굴려봤지만 눈알만 팽팽 돌았다. 역시나 관련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이런 젠장, 이게 도대체 뭐냐고. 예산 좀 깎았다고 공수부대를 서울 한복판에 들이겠다고? 어절 하나 하나가 모두 위헌으로 보이는 포고령까지 보니, 헛웃음조차 말라붙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사태가 일단락돼있었다. 계엄은 해제됐다. 하지만 당장 달라진 건 없었다. 폭군 대통령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추앙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보는 시선도 변치 않았다. 그 분의 시선으로 보자면 불과 하루 전에 전파를 탄 내 기사는 반란수괴의 선동문과 다름 없었을 게다.
기자가 된 이후로 연락은 가장 많이 왔다. 그만큼 사람들도 궁금하고, 다급하고, 조마조마했던 것이겠지. 근데 이걸 어쩌나, 나도 당신들과 다를 게 없었는데 말이죠... 아주아주 조금 더 알고, 아주아주 약간 빨리 더 알 뿐인데.
국회에서의 계엄 해제를 보고도 한참을 더 잠을 못 이루다가, 침대에 누웠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사태지만, 경험칙상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무언가가 펼쳐질 것이란 건 명확했으니까. 눈을 지긋이 감고 곰곰이 생각을 했다. '이 미증유의 사태는 어떻게 흘러갈까?'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다가, 머릿속에서 꼬이고, 그대로 엉켜버렸다. 확실하게 짚이는 바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건 무엇일까? 그저 성실하게 한 글자 한 글자 기록할 따름이겠지. 당장 내일도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며칠이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계엄의 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