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 2025년에 현실이 되었다.
요즘 SNS에서 일부 부유층,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가난을 조롱하는 사진이나 영상을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
비행기 일등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는 사진을 올리며 "지긋지긋한 가난"이라고 쓰거나, 라면과 김밥을 먹는 사이에 그 사이에 포르쉐 키를 올려두는 등 명품 브랜드로 둘러싸인 일상 속에서 일부러 자신이 가난함을 연출하는 게시물들이 유행한다. 이런 사진이나 영상이 콘텐츠를 위한 설정일 수도 있고, 개인의 농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을 조롱하는 듯한 이런 '빈곤 코스프레'가 '유행'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웃고 넘기기엔 심각한 사안이다.
도를 넘는 '빈곤 코스프레'
일부 부유층과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빈곤 코스프레를 하는 장면이 불편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이 조롱하는 듯한 진짜 가난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은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니며 그 가난의 끝이 어디인지 얼마나 비참한지 알 수 없다. 빈곤 코스프레처럼 촬영이 끝난 뒤 벗어둘 수 있는 의상도 아니다. 가난은 지속되고 누적되며, 빈곤한 이들의 존엄을 송두리째 빼앗는다.
이상하다. 왜 부자들은 빈곤한 이미지마저 차지하려는 걸까? 그리고 우리 사회는 왜 이런 기괴한 현상을 내버려 두는 걸까? 부유한 사람들도 '평범해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일까? 노골적인 부를 과시하는 것은 구시대적이고, 검소함과 소탈함이 미덕처럼 소비되는 시대라서 일까? 하지만 퍼스트 클래스에서 라면을 먹는 장면이 주는 빈곤 코스프레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안전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가난을 흉내 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유한 계급의 증명이다.
부자들이 빈곤 코스프레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SNS 알고리즘의 구조다. 이런 행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분노와 허탈감, 모욕감은 참여를 낳는다. "이건 너무하다"는 비판조차 조회수와 댓글 수로 환원된다. 결국 누군가의 불편함과 상처는 클릭률로 계산되고, 감수성은 비용이 되며, 무감각은 전략이 된다. 이렇게 해서 빈곤 코스프레는 문제적이면서도 '잘 되는 콘텐츠'로 살아남는다.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
이 지점에서 박완서의 단편 소설 <도둑맞은 가난>이 떠오른다. 197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 오히려 더 또렷한 현실로 되살아난다. 작가는 자신의 글이 먼 미래의 풍경이 될 것을 예견하며 썼을까. 작품 속 화자는 가난으로 가족을 잃고, 가난 그 자체가 삶의 조건인 인물이다.
주인공이 만난 상훈은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타인의 삶을 빌려 가난을 '체험'한다. 그러나 그 체험은 어디까지나 안전이 보장된 놀이에 불과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주인공에게 그것은 가장 잔인한 배신이 된다. 부자들은 결코 탐내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가난마저 빼앗겼다는 배신감, 그로 인한 절망은 단순한 실연의 차원을 넘어선다.
"도대체 가난을 뭘로 알고 즈네들이 희롱을 하려고 해. 부자들이 제 돈 갖고 무슨짓을 하든 아랑곳할 바 아니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 만은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 가난한 계집을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가난 그 자체를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이다."
- 박완서 <도둑맞은 가난> 중에서.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은 가난 그 자체보다, 가난을 대하는 사회의 시선과 그것이 한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훼손하는지를 다룬다. 50년 전에 쓰인 이 소설의 또 하나 독특한 설정은 작가가 주인공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인의 특정한 신상을 드러내기보다, 지긋지긋함으로 표현되는 가난을 '모두의'의 경험으로 확장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가난이 문제가 아닌, 짓밟힌 존엄
화자는 가난한 형편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숨기지 않고 나름의 질서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 특히 중산층 이상인 인물들은 화자의 가난을 연민하거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때로는 선의를 핑계로 화자의 가난한 상황에 무례하게 침범한다. 그 과정에서 화자의 삶과 감정,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은 고려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화자가 자신의 가난이 타인의 동정과 참견, 혹은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되고 있음을 깨닫는 지점이다. 이때 화자는 자신이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스스로 감당하고 지켜오던 가난마저 연인에게 '도둑맞았다'는 배신감에 휩싸인다. 이는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가난을 감내하며 살아왔던 한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불공평하다.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세상이 불공평하다 해도, 가난마저 일부 부유층의 조롱이자 그들이 또 다른 부를 축적하기 위한 연출의 소재가 되는 사회는 정상적이라 보기 어렵다. 이런 기현상의 본질은 '누군가가 비행기 일등석에서 라면을 먹느냐'가 아니라, 그 장면이 어떤 계층적 위치와 어떤 경제적 안전망 위에서 만들어졌느냐다.
'평범함'과 '빈곤'마저 부유층에게 뺏기고 심지어, 조롱거리가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실제 가난의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해졌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가난은 부자들의 놀이용 콘텐츠가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매일 우편함에 쌓이는 청구서를 보며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다. 가난을 조롱하는 행위는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