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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31. 2024

정신의 준비

내면 작업 18


24.05.31



꿈 #1 (24.05.01)


어떤 종이에서 작은 벌레들이 무수히 증식한다. 나는 라이터로 그 벌레들을 태워 없애려고 한다. 그리고 한 아니마와 관계를 다시 이어가려는 어떤 시도 와중에 나는 수동적으로 군다.



꿈 #2 (25.05.08)


일본 여행을 홀로 하는 중이다. 어떤 축제 지역을 가고, 경사를 넘고, 모퉁이를 도니까 난데없이 허름한 식당이 나타난다. 김치말이 국수집. 한우도 판다. 들어가니 한 여자 주인이 있다. 들어가자 손님들이 하나 둘 입장한다. 남자들이 많다. 정겨운 분위기인데 한우는 비싸서 먹지 못한다. 여자 주인이 아니마로 보였는데, 중년이었다.



꿈 #3 (24.05.31)


꿈에서 한 여자친구의 집에 간다. 그 집은 나에게 예전 상도동 살 때의 어떤 집 풍경을 느끼게 한다. 방에 가니 여자친구의 여동생 둘을 소개 받는다. 어떤 책을 보면서 서로의 관심사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그중 한 여동생은 어떤 고대 민족? 같은 무언가에 강한 흥미와 관심이 있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태도다. 그러다 그 여동생과 어딘가로 이동한다. 그곳은 새하얀 눈이 뒤덮인 어떤 설국인 거 같다. 그 공간 입구 즈음, 들어가려면 마치 썰매를 타듯 내리막 경사를 타고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나는 맨발이었고, 한 번 내려가면 꽤나 험난할 거 같은 인상으로 난처해 한다. 그 여동생도 이에 동의하며 우리는 발길을 돌린다. 곧장 어떤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밑으로는 어마무시한 강이 흐른다. 마치 늪지대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도, 오물을 연상시키도 하는 강이다. 급류가 거세다. 다리는 나무로 되어 있는 거 같은데, 나는 왼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다리 바닥이 너무 위태롭다. 구멍이 나 있는 거 같고, 곧장이라도 깨질 것만 같다. 아주 얇은 유리로 간신히 유지되는 기분이다. 나는 왼손에 무언가를 쥐고 동시에 밧줄을 잡으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느끼며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무사히 건너고, 그 여동생과 같이 어딘가로 향하다 꿈에서 깬다. 그 여동생은 명백히 아니마였다.






2월 이후 꿈 기록을 아예 안 하고 지냈다. 간간히 기억나는 꿈을 적었지만, 확실히 성실하진 않았다. 간혹 몇몇 기억에 남는 꿈을 희미하게 적어뒀다. 어제 꾼 꿈은 좀 강력했다. 앞뒤로 다른 꿈도 있고, 최근에 꾼 다른 꿈도 있는데 기록하지 않아서 잊어먹었다.


 24년 1월 1일부터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여태 유보하고 외면했던 '돈에의 열등함'을 발달시키기 위함이었다. 몇몇 각오를 하기도 했지만, 역시 열등함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실제로' 내가 그런 상태가 되어야만 했다. 즉, 심리적으로 거리를 둔 상태에서의 관찰을 유지함으로써는 발달이 이뤄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실지로 그런 열등한 상태가 되어야만이, 발달 가능태에 놓이는 것이다.


 그렇게 5월에 아주 난리가 났다. 마음을 엎지르고 말았고, 통제되지 않는 휘말림과 사로잡힘의 상태가 되었다. 이 상태가 되면 악순환이 시작된다.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어 겉잡을 수 없이 휘말려든다. 돈에의 열등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과 결부지어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돈이 지니는 몇 가지 정체성과의 연루 관계로 말미암아 관찰할 수 있다.


 5월에 어머니 생신이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선물하고 싶은 아주 단순하고 세속적인 욕망에 휘말려 들었다. 그 마음으로 일반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당연히, 결과는 피폐하다. 이때 심리 상태의 관찰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 보일 리 만무하다. '합리화'는 여전히 잘 작동한다. 왜냐하면 자기 관찰과 합리화는 별개의 기능이기 때문인데, 합리화는 자신의 정신 상태에의 균형을 위해 즉각적으로 무언가를 무마하고, 봉합하고, 은폐하는 기능인 반면 자기 관찰은 지금 이러한 정신의 흐름이 어떤 심리적 불균형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지에의 관찰 기능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지금도 자기 관찰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을 공산이 크다.


 꿈 기록을 해두고 정신 근황을 적는 이유는, 무언가가 연루되어 있다는 희미한 감각 때문이다. 일단 아니마와의 조우나 관계는 여전하다. 즉 심각할 정도로 무언가를 돌이킬 수 없게 되지는 않았다. 오늘 꾼 여자친구는 나의 감정 유형을 반영한 어떤 얼굴이었고, 그의 여동생이라 함은 아니마와의 관계 분리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말했지만, 2월 이후로 '융'에게서 배운 모든 것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다. 나의 버릇 중 하나는 무언가에 탐닉해 습득한 것들을 거의 눈녹듯이 없애버리는 것이다. 즉 배운 것을 과감히 잊는다. 그리고 잊는 건 곧 잃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꿈을 바라보는 것도 길을 잃는다. 이게 맞는지, 이렇게 보는 게 맞는지 융 읽기 전 상태와 별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 다만 나에게 유의미하게 포착되는 것들은 이렇다. 새하얀 설국, 어떤 고대 민족의 이야기, 맨발, 어마무시한 탁한 강, 위태로운 다리 건너기. 꿈 속에서의 나는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으려 한다. '죽음'을 경계하고 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리시키고 있다. 융을 읽는 시기에 꿨던 꿈 중에서 '물'과의 접촉 중 가장 얌전하고 안전했던 꿈은 대학가 정문 앞에서의 졸졸 흐르는 물이었다. 그 꿈은 꽤나 아름다운 이미지를 풍겼다면, 이번 꿈의 물은 매우 사납고 거칠다. 간혹가다 이런 거친 물, 거세고 사나운 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우 험난하게, 위태롭게 그 '구간'을 지나간다.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이에 휘말려 죽는다든가 실지로 위험에 직면한다든가 하는 게 없었다. 이런 일련의 계기들로 말미암아 내가 관찰할 수 있는 건, 단순히 '그래 난 아직 위험하지 않아' 따위의 합리화된 안전이 아닌 '위험한 무의식'과의 관계에서 내가 취하는 태도와 겪는 상태가 어떠한가를 좀 더 상세히 살피는 일이다. 또한 근래 환상 이미지로 새하얀 것들이 자주 나온다. 2개의 구멍도 나온다. 어떤 형상들. 기록을 하지 않아 모두 의식 바깥에 잔존시키고 있다. 


 돈에의 열등감은 내가 무의식과의 조우를 할 수 있게 자극하는 쉬운 통로로 보인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욕망의 직접적인 사로잡힘을 느끼게 하기도 하지만, 내가 의식하고 있는 건 어떤 '시간성'이다. 바바라 아담을 참조해 존 어리가 풀어낸 문구, '돈이 곧 시간이다'라는 건 정말이지 적확하다. 프랭클린 말마따나 '시간이 곧 돈이다'가 아니라 그 반대가 맞다. 이 둘은 나이브하게 외향과 내향의 차이로 구분지어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내가 느끼기론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 양상을 나타내는 거 같다. 돈에의 열등감을 발달시키고자 시간을 쓰는 상태 속에서 나의 정신은 '시 작업'과 멀어진다. 이 둘은 서로 공존할 수 없게 느껴진다. 그 이유를 달리 표현할 무수한 관점이 있겠으나, 일단 내가 보고 있는 건 서로 다른 '시간성' 때문이다. 


 돈이 갖는 시간의 특징은 다른 시간 특징과 너무나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독립적이기도 하다. 인간 정신은 이에 대해 호환이 쉽게 이뤄지지만 자율성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구조 접속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희미하게라도 잠시나마 직관이 나에게 보여줬던 게 있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가 밖에서 관찰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안에 있어야 하는데 바깥에 걸린 것처럼 느껴진다는 그런 수동적인 상태에 대해서다. 나는 이를 '방심한 채'라고 언어로 붙들어 놓는다. 방심한다는 것, 외향과 내향의 보다 세밀한 차이.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게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지의 체험이 쌓이고 있다.


 나카이 히사오의 인지 모델인 '분열친화적 미분회로'는 나에게 매우 매력적이고 강력한 재서술 어휘다. 이것은 인간이 일상 생활 속에서 특정 '시간 의식'을 겪을 때의 상태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합해 보인다. 매우 순간적이고 즉시적인, 외부 환경에서 주어지는 미미한 '차이'를 순간적으로 캐치해 그에 대한 반응을 내보이는 것. 히사오가 예시로 들어주는 장면은 자전거를 타고 경사를 빠르게 내려갈 때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순간적인 '말'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이런 분열친화적 미분회로의 인지가 인간 문명에서 주요하게 작동했던 시기로 유추되는 게 수렵-채집의 행위다. 긴즈부르크가 '징후적 지식'이라고 일컬은 것처럼, 우리 인간 정신은 사소하게 보이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마모되거나, 휘발되거나, 희미해져서 흔적이 다소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연결'을 상정할 수 있는, 마치 냄새를 맡는 것처럼 인지할 수 있는 정체불명의 가능태를 인지하는 행위가 가능하다. 이것이 유희나 놀이로 풀이되는 건 매우 오래된 역사다.


 다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소위 '정상'이라고 불리는 상태에서의 미분회로와 이것에 쉽게 사로잡히고 휘둘리고 마는 상태는 명백히 다른 정신 행위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내가 돈에의 열등감이라고 부르는 건 지극히 후자의 정신 상태와 결부된 나의 취약점이 연결된 것이다. 노동과 결부되어 돈을 벌어들이는 여러 가치 관계망이 사회에는 있다. 그중 분열친화적 미분회로를 활용해 돈을 버는 것도 가능한데, 이에 대한 단점과 취약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발달이 가능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구조 위에서다. 이 구조는 소위 투기적 구조, 투쟁 공간으로도 포착된다. 이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특정 정신 상태를 '우선' 강요하는데, 그것은 이지선에서 오직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이건 내가 꿈에서 어떤 강을 건널 때, 새하얀 설국으로 들어가기 전 상태에서 겪은 것과 유사하다. 꿈 속에서 당시의 나는 둘 중 하나를 해야만 했고, 그래서 그 반대되는 것에의 강한 부정을 느낀다. 그래서 여유가 없고, 강력하다. 결국 현실로 돌아와 무의식이 나에게 보여준 것을 토대로 나를 알아보는 방식은 이러하다. 지금의 나는 '준비'를 못하고 있다는 것.


 이 준비는 가타부타 합리화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준비다.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현실적 이유를 근거로 삼아 이래 해야 한다, 저래 해야 한다 따위로 준비 상태를 상정하는 건 오류다. 지금 내가 느끼기로 정신의 준비란 곧 시간성의 분화다. 분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 환경으로부터 주어지는 특정 자극의 시간성에 호환되는 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그 시간성의 문법 위에서 합리화가 재구축된다. 시간성의 다른 이름은 '의미화, 역사, 가치' 등등으로 완충되어 있지만 나에게는 구조 자체의 모델링에 적합하게 느껴지지 않기에 채택하진 않는다. 꿈이 나에게 보여준 것, 또 꿈을 바라보며 나의 근시안이 보여주고 있는 것. 그것은 정신의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다.


 융의 텍스트를 빌려와 꿈 속의 어떤 소재가 나타났을 때, 이 소재에는 이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따위로 거리두기의 합리화는 도무지 도움되지 않는 거 같다. 벌레가 나타났다는 둥, 무의식=물을 건넌다는 둥에 대해서 더욱 그렇다. 일단 의식은 의식의 일을 해야 한다. 난 의식 분화와 발달에 흥미를 느끼고 노오력을 수행할 성향이고 잘 맞기 때문에 이쪽 방법을 적극 채택한다. 정신의 준비를 시간성으로 접근해 구축한다는 게 뭘까.


 당장 붙들리는 건 위태로움, 사로잡힘이라는 특정 상태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이다. 다만 눈깔이 충혈되듯, 피가 쏠리듯, 힘이 들어가는 걸 조절해야 하는 게 관건이다. 이런 신경 조절의 기예는 허구이자 허상이지만, 리비도라 불리는 정신 에너지의 역동 모델링으로 가정한 채 수시로 트래킹을 하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는 운동이기도 하다. 열등함의 다른 영토인 '유아적 전능감'이라는 아주아주 오래된, 그래서 아주아주 효율적인 매혹은, 이러한 위태로움과 사로잡힘의 상태로부터 스스로를 보존하고 훼손된 자기 효능감을 복구하고자 어떤 '닫힌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으로의 현실 도피는 아주 치밀하고 정교하게 진행된다. 합리화는 이때 제갈공명 뺨치는 전략가다. 인간 정신이 어떤 실패나 손실, 인정할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 훼손'을 겪을 때는 대개 이런 합리화라는 제갈공명에게 손길을 건넨다. 이는 안나 프로이트가 포착한 '청소년기의 지성화'와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다만 발달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직면'해야 한다는 것.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억지로 직면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직면할 수 있어야 하는 바로 그 상태로 직면해야 한다. 내가 느끼기로 바로 이것이 '준비'다. 이 준비 상태가 되어야만 그 다음이 나타날 것처럼 보인다. 보통 이런 일련의 준비는 비의식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의식의 관할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일련의 준비를 우연적으로, 우발적으로 겪는다. 이성 사용자들 중 나같은 변태들만 이런 걸 의식의 관할에 두는 거 같다.


 시간성으로의 모델링은 이러한 직면하기가 어떤 시간성으로 구축되어야 하는지를 포착하게 돕는다. 먼저, 순간성이라 일단 붙들리는 바로 그러한 시간성의 '무수한 반복'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지속성이라 불리는 시간성의 '닻'이 필요하다. 이 둘의 상태는 귀르비치가 포착한 '폭발적 시간'과 '영속적 시간'의 구분과 크게 다르진 않다. 과거 서구에서는 카이로스적 시간, 크로노스적 시간이라 분리했는데 자연 공간과의 결합을 전제로 한 시간관은 21세기 대도시에서, 자본주의에서는 좀 더 발달될 필요가 있다. 간혹 프루스트의 사례를 빌려 기억의 회귀, 소급을 가리키는 시간성의 관찰도 건네지는데, 내가 느끼기론 간략하게 히사오의 모델을 빌려 '미분회로-적분회로'로 일단 포착하는 게 호환성 측면에서 유용하다. 즉 인간의 시간 의식이라고 하는 건 '기울기'로 대응시킬 수 있는 지향성의 포착이 중요하다.


 시계로 대응되는 기계 시간의 합리성은 이러한 시간과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양립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며 한 쪽을 죽은 시간, 다른 한 쪽을 살아있는 시간이라 부르는 낭만적 관점을 채택하지만 내가 느끼기론 거기에 가치 판단을 감행하는 건 그다지 발달된 태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인간 정신, 특히 무의식과의 관계에 있어 성숙한 발달로 말미암아 느낄 수 있는 '정신적 기쁨'의 의미화는 확실히 고차원적이라 불리는, 보다 상위의 의미 체험으로 쉽게 수직화된다. 하지만 여기에 수반되는 시간성은 그저 '다른 상태'임을 의미할 뿐, 무엇이 더 좋고 나쁜지, 무엇이 더 옳고 그른지 따위의 가치 판단과는 별개의 사태다. 즉 우리의 집단 의식은 이러한 별개의 사태에 가치화 논리를 투영시킬 수 있으나 귀속되는 건 아닌 것이다. 


 미분회로와 적분회로로 대응되는 우리의 인지 상태는 자연스럽게 방치할 때 일상의 여러 체험을 인식하게 돕는다. 기억의 회상, 상기, 냄새, 촉각, 맛, 소리, 이미지 등 감각과 어우러져 시간의 중층종합을 이끌어내는 체험뿐 아니라 어떤 학습과 규율, 합리화에 의거해 자신의 수행 능력을 일궈가는 일련의 소급도 그렇다. 문제는 이러한 일상 속 비의식 층위에서 벌어지는 시간성의 회로가 교차되거나 혼동될 때 우리 인간의 정신이 모종의 '실패'를 겪는다는 것이다. 이 실패의 보다 구체적 표현은 '부하'다. 즉 신경 비용이 발생하고, 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에너지가 투입된다. 내가 느끼는 정신의 준비란, 바로 이런 부하로부터 적응의 상태로 임하는 것이다. 통념으로 쉽게 말하면 '배우는 상태'다.


 배우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당연히 슬로터다이크가 알려주는 '기예'가 무진장 필요하다. 또한 이런 기예들은 누군가의 교육으로 트레이닝할 수 있도록 모듈화가 가능하지만, 마치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 자연발생으로 자발적 학습이 가능하기도 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특정 누군가의 정신이 발달되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관점은 소위 '천재론'을 지탱하는 어떤 능력론 문법과 크게 다르진 않다. 근대 인간은 부자연스럽게 인간 정신이 늘 발달될 수 있고, 사실은 '발달되어야만 하고', 그런 시선으로 정신을 포착하고 관찰하는 데 능하다. 나도 나 자신의 정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이 과도한 규율인지, 자연 문법의 '적응'인지의 차이가 구분되어야 함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무의식이 나에게 계속 보여주고 있는 건 한 문장으로 '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다. 나는 아직 이에 대해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이런저런 발상을 해 보지만 '현실'은 도착하지 않고 있다. 시행착오가 쌓여만 간다. 조급함과의 줄다리기도 진행 중이다. 비의식이 얼마나 강력하고 유용한지는 이럴 때 드러난다. 의식의 관할에 들어오면 온갖 것들이 '부하'로 포착되어 그만큼 버겁고 감당하기 힘든 것이 되는데, 비의식으로 이러한 모든 것을 넣고 닫으면 부하를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아직 이 기예를 단 한 번도 발달시켜본 적이 없다. 그래도 조금씩 연습 중이다. 할 수 있는 걸 이것저것 해볼 수 있고, 또 할 수 있다는 지금의 이 상태가 '닻'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한동안은 현재에 매달리고 싶다. 그래서 꿈 기록이나 만다라 여정에 에너지를 투입하지는 않을 거 같다. 이렇게 간혹가다, 드문드문 무의식이 말걸어줄 때나 한 번씩 호응할 거 같다. 지금의 나를 바라보지 못하는 게 불안하면서도 안정적이다. 이 기만이 지금의 목발이다. 때가 되면 부러지거나 필요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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