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6일
당신에게
잘 지내고 있나요? 헐레벌떡 쫓기듯 회사와 집을 오가며 어느새 2023년이 되었습니다. 태풍의 계절을 맞은 마다가스카르의 오후 두 시는 축축하고 요란합니다. 회사 창밖으로 굵은 빗줄기가 쉴틈 없이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불호령을 치는 날들이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게 싫지는 않았습니다. 안온한 실내에서 비 내리는 세상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게 좋았습니다. 이따금씩 먹구름 사이로 비져나온 빛줄기나 마천루 없는 풍경 위로 선명히 걸린 무지개를 발견하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야심한 시각, 지금도 창밖으로 밤비가 내리고 있네요.
저는 대체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아 아슬아슬할 때도 있지만, 그럭저럭 버티고 있습니다. 당신의 일상과 비슷합니다. 힘든 날도 있고 조금은 수월한 날도 있죠. 회사와 집을 무한반복하는 생활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점점 단조로운 인간이 되어 가는 것 같긴 합니다. 특히 모든 상념과 감정의 원천이 회사가 되어버린 것 같아 가끔은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성취의 즐거움도, 관계의 기쁨도, 스스로에 대한 실망도, 인간에 대한 환멸과 고통도 모두 회사라는 공간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올해 들어 내게 맡겨진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일이 없는 것보다야 많은 것이 낫긴 하지만, 처음 입사할 때는 생각지도 못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내 자리의 일이라는 것이 번역일이나 보고서를 쓰는 일이 주된 업무인줄 알았건만, 날이 갈수록 갖가지 사업과 행정일들이 빚덩이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하나 위에 또 하나가 쌓이고, 다른 하나가 쌓일 때쯤, 또 하나를 얹기 위해 상사는 내게 전화를 겁니다. 끊임없이 일을 해도 투두리스트가 줄지 않는 이유입니다. 남들보다 기본급이 높으니, 더 많은 일을 해야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만,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물리적으로 더 많은 일을 하라고 더 많은 돈을 주는 것이었나요? 저는 그게 제가 가진 얄팍한 전문성 때문인줄 알았습니다만.
일이 많은 것이 상사의 탓만은 아니겠지만, 때때로 나는 그를 원망하며, 저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가혹할까 생각합니다. 그 가혹함이란, 무자비하게 던지는 업무량 때문만은 아닐겁니다. 나는 그의 성정 속에서 가혹함을 봅니다. 일터에서 그는 히스테릭하고 까다로우며, 주변을 몰아세우고 압박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냅니다. “함께” 일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부리고 기능적으로 사용하죠. 그리고 그 기능이 오류를 일으킬 때, 면전에서 즉각 분노를 퍼붓습니다. 찢어질 듯 목소리를 높여 추궁하고 비난합니다. 처음에 나는 이런 사람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습니다.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 그것도 공적인 공간에서, 사람이 사람을 이토록 함부로 대할 수 있다니요. 직급과 인종을 떠나, 우리 모두는 하나의 인격체인데 말이죠.
물론 인간은 입체적인지라, 그 사람도 어떤 공동체 안에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겠으나, 중요한 건 우리가 공적인 관계로 맺어진 사이라는 점이겠지요. 업무 이외에 그를 만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실수를 비난하고, 문책하고, 상대를 굴복시켜 사과와 반성을 받아내어 얼마나 더 행복해지나요? 부족한 것은 다시 채우고, 실수는 수습하면 되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이며, 사람들을 상처입힐 일인가요. 우리가 하는 일이 뭐 인류의 목숨나 지구의 종말이 달린 대단한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일은 그저 일일 뿐입니다. 평가의 날을 세우기보다,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추구할 수는 없는 걸까요? 직급은 달라도, 일터에서 우리는 공동의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요?
오늘의 나는 하루종일 갖가지 업무를 천수관음처럼 해치웠습니다. 와중에 급박한 데드라인을 맞추느라 마음을 졸였고, 비협조적인 카운터파트를 구슬리고 압박하느라 애를 태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업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화를 내기도 했고, 마음에도 없는 사과도 해야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못한 산더미 같은 일들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작은 공을 열두 개쯤 던져 저글링을 하며 외발자전거를 타면 이런 기분일까요? 해가 질 때까지 모든 에너지를 풀가동했는데도, 오늘은 잠이 오지 않네요. 회사에서 쓰는 에너지 스위치를 꺼야 쉴 수 있는데, 좀처럼 꺼지지 않습니다. 어딘가 고장나버린 것처럼요.
쓰다보니 요즘의 나는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활자로 쏟아내고 나니, 조금은 비워진 느낌이 듭니다. 살다보면 이런 날들도 있는 거겠죠. 이 시기가 지나가면, 조금은 수월한 날들도 찾아올겁니다. 상사의 기대하지 않았던 배려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스르르 마음이 녹는 날도 있겠죠. 어느새 창밖에는 비가 그치고 차가운 고요가 내렸습니다. 과열된 나의 에너지 스위치도 조금씩 온도가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외발자전거를 타듯, 휘청이는 오후 두 시를 보낸 모든 당신에게 창밖의 고요를 전합니다. 근심마저 지운 깊고 까만 잠 속에서, 고요하고 평안한 밤 보내기 바랍니다.
2023년 3월 16일
사과나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