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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륜 Sep 17. 2018

노력해도 달라지는 게 없어요_법륜스님 즉문즉설

67화

* 즉문즉설은 질문자의 조건이나 상황을 고려한 대화입니다.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노력해도 달라지는 게 없어요.” 


질문자 “지난 2년 동안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아침에도 늘 새벽 3시 50분에 싹 일어났습니다. 항상 그 시간에 일어나서 법당에 나가서 기도를 하고, 법당에서도 뭐든지 흔쾌하게 봉사해왔습니다. 나름 수행, 보시, 봉사 모두 열심히 해왔는데도 저를 돌이켜보면 2년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 웃음)


스님께서 100일 기도를 하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고, 3년 기도를 하면 자기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저는 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제 자신이 잘 안 보입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생각이나 수행하는 방법이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직장을 다니는 제 모습도 그대로이고, 아내와 다투는 모습도 그대로이고, 아이들과 지내는 모습도 그대로입니다. 제가 너무 더디게 가는 것 같아서 개선책이나 다른 방법이 있는지,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법륜스님 “네, 별 문제없어요. 지금까지 해오신대로 앞으로도 꾸준히 해나가시면 돼요.”


“그런데 100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제 자신이 안 보입니다.”


“왜 괴로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수행은 알아차림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자신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질문자는한 번 하기로 한 건 해내는 힘이 있지만, 급한 성격이 있고 살피는 힘이나 돌이키는 힘은 부족한 것 같아요.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를 살피는 것, 즉 ‘알아차림’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결국 알아차림에서 시작됩니다.


기도를 하면서 자기를 가만히 살펴보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집에서 문득 화가 날 때도 예전 같으면 그냥 화만 내고 말았을 것을 이제 ‘어, 그런데 내가 화를 왜 내지?’하고 생각해보고, ‘아, 내가 이럴 때 화를 내는구나, 화를 자주 내는구나, 아내의 이야기를 등한시하며 듣는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질문자는 이런 생각이나 알아차림이 전혀 없나요?”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100%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고, 조금 알아차립니다.”


“그래요. 조금 알아차리더라도 알아차림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도 알아차림이 크지 않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문제 삼으라는 것이 아니라 ‘아, 나에게 이런 알아차리는 면이 많지 않구나’하고 자신에 대해 자각하는 거예요.


다른 예로,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을 쓰고 걸려하는구나, 누군가 이런 유혹을 하면 거기에 내가 자주 넘어가는구나, 누가 돈 버는 이야기를 하면 내가 솔깃해하는구나’ 이렇게 자기를 안다는 것은 결국 자기 업식(業識)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를 안다’고 할 때의 ‘자기’는 다름 아닌 ‘자기의 까르마’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면 자기의 까르마가 외부 경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 수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걸 ‘성격’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렇게 자기의 까르마의 반응을 보고 알아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 반응을 보고 ‘어떤 반응은 좋고 어떤 반응은 나쁘다’고 따질 필요는 없어요. 그저 그렇게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아, 내 까르마가 이렇게 형성되었고, 이렇게 반응하는구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반응들은 나에게 손해를 끼칩니다. 내가 버럭하고 화를 자주 내면 주변에서 비난을 받거나 사람들이 싫어하게 돼요. 그 피해가 견딜만하면 그냥 ‘미안합니다’ 사과를 하고 과보를 받는 방법도 있고, 피해가 심각해서 ‘내 업에 끌려가서 이런 피해를 계속 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 반응을 더 면밀하게 살펴서 더 이상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 길을 찾는 방법도 있어요. 화를 참는 게 아니라 화를 내보고서 나에게 오는 손해가 크다는 것을 알고 조금씩 화를 내는 횟수로 줄이고, 그 강도도 줄이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내 까르마가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아는 것을 자기 자신을 안다고 하고, 그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반응을 달리하는 것이 곧 자기를 변화시키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주변에서 ‘수행 한다더니 조급함이 많이 줄었네, 성질이 많이 죽었어, 요즘 내 말을 전보다 귀담아 들어주는 것 같아’ 등의 반응이 나타나요. 이런 것이 곧 자기 변화예요.


지금 질문자는 3시 50분에 일어나기로 했으면 그때 일어나고, 이건 아주 좋은 성질이에요. 그런데 그건 질문자가 가진 성질이지 그렇게 하는 것이 수행은 아닙니다. 수행에는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을 통해서 자기에게 손실이 되는 행동을 막아내는 까르마의 변화가 일어나야 해요.


그렇다고 시작부터 180도 확 바뀌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변화는 처한 상황이 너무 견딜 수가 없을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엄청난 고난에 처했을 때 사람이 확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반면 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확 바뀌지 않아요. 안 바뀌어도 큰 문제가 없는 사람은 바뀌더라도 천천히 바뀝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바뀌어야 될 필요성을 무의식에서 덜 느끼기 때문이에요.


꾸준히, 꾸준히


『관무량수경』에 등장하는 위제희 부인도 착한 사람이다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면 뭐든지 좋아했어요. 어릴 때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결혼도 큰 왕국의 왕이 될 사람과 결혼을 했고 자기가 낳은 아들까지도 그 왕국의 왕이 될 태자였으니 속세의 복으로 따지면 정말 많은 복을 타고난 사람이었어요. 그러다보니 평소 부처님의 말씀은 늘 훌륭하고 좋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 또한 훌륭한 수행자라고 착각했습니다. 수행자라기보다는 그저 믿고 따르는 착한 신도였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를 가두고 왕좌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남편이 이기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음에 처하고, 아들이 이기면 되려 남편이 죽음에 처하는 싸움이 시작된 거예요. 결국 아들이 이겨서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그런 남편을 살리려고 보살피는 노력을 하다가 아들로부터 역적으로 몰려서 결국 자기 자신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이건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여인이 아니라면 또 겪지 않을 불행이에요. 그러니 가만 보면 어느 순간에는 이 세상 누구보다 복이 많은 것처럼 보였던 위제희 부인이 동시에 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 그 누구도 겪지 않을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된 거예요. 남편이 바로 자기 아들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그걸 말리다가 자신까지도 역적으로 몰려서 곤궁에 처하게 되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죠.


그렇게 위제희 부인 자신도 갇히게 되었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이 세상의 복이라는 것이 뜬구름과 같고, 복이 곧 재앙이구나’하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선 부처님께 법을 청하게 됩니다. 그 전에도 부처님의 법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착한 신도로서 법을 접한 것이었고, 감옥에 갇혀서는 고통을 겪으면서 진심으로 법에 대해 묻게 된 거예요. 그리고 위제희 부인의 그 질문에 답을 한 것이 바로 『관무량수경』입니다.


깨닫기 위해서 꼭 재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위제희 부인의 예에서처럼 인연이 도래하는 대로 법을 접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지금처럼 좋은 결심을 가지고 앞으로도 꾸준히 정진해 가면 돼요. 거기다가 앞으로는 조금씩 살피는 일까지 같이 해나가면 됩니다.


질문자처럼 큰 문제가 없는 사람은 살피는 힘이 약하기 마련이에요.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큰 문제가 없으니 무의식에서 살펴야 될 필요성을 크게 못 느낍니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조금씩 알아차리면 필요한 부분에서 변화를 줄 수 있어요.


자신을 아는 사람은 억울하고 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내한테 물어보면 질문자에게 문제나 개선할 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아들한테 물어보면 또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동료나 선후배에게 물어보면 뭔가 있겠지요?”


“네.”


“그게 무엇인지 자기 자신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살피다보면 ‘아, 이런 부분은 아내가 조금 힘들겠구나, 이런 부분은 아이들이 조금 힘들겠구나, 이런 부분은 직장 동료나 선후배들이 조금 힘들겠구나’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고 ‘남들도 그 정도는 다 있어’ 할 정도면 지금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 문제가 상대방으로부터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나에게 손실로 다가올 위험이 있으면 개선해야 합니다.


지금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비난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 외로워질 수도 있어요. 아내의 경우에는 평소에는 별 문제가 안 되다가 그런 게 누적되어 한계에 부딪치면 어느 날 보따리를 싸서 떠나거나, 나이 들어서 이혼을 요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어요. 아내가 당장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괜찮았다가 나빴다가 괜찮았다가 나빴다가를 반복하다보면 사람마다 임계점이 있는데, 그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그때 가서는 아무리 빌어도 해결이 잘 안 됩니다.


내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내린 결정 같아 보이고 황당해보일지 모르지만 그게 다 속에서 쌓인 거예요. 이건 남편들도 마찬가지예요.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랑은 더 못 살겠어’하고 나가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정작 아내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참고 참다가 임계점을 넘어가는 경우라고 볼 수 있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임계점을 넘기 전에 알아차리고, 평소에 자신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개 자신을 살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재앙이 닥치는 것처럼 느낍니다. 평소 생각지도 못한 일이 갑자기 일어나는 거예요.


질문자도 자기에 대해서 알기 시작하면 미래에 다가올 과보를 미리 예측할 수 있습니다. 어떤 비난이나 재앙이 올 때도 이미 감을 어느 정도 잡고 있기 때문에 놀라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는 것이야 사고니까 알 수가 없지만, 내 성질로 인한 것은 인연과보로 일어나기 때문에 조금만 지혜가 있으면 얼마든지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럴 때 자신을 아는 사람은 억울하고 분하지 않습니다. 마치 돈을 빌렸는데 ‘돈 받으러 왜 안 오지?’ 하다가 어느 날 찾아오면 ‘아, 역시 찾아오는구나’하고 알듯이, 내 성격으로 인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질문자에게 살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꾸준히 하면서 조금 더 살펴보세요.”


”네, 잘 살펴보겠습니다.” (모두 박수)

‘나는 이렇게 반응하는 구나.’ 스스로를 알아보세요. 


[원본]https://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7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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