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로창고극장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조심스럽게 들어서니 가장 안쪽에서 작가가 손짓을 한다. 아늑하게 마련된 자리에 곽파 작가와 내가 마주 앉는다. 작가는 종이를 한 장 꺼낸다. 꼭 MBTI 검사지처럼 생긴 종이다. "양쪽에 적힌 단어를 보시고, 더 익숙하거나 가깝게 느껴지는 쪽에 표시를 해주시면 돼요. 그리고 익숙함의 정도를 1부터 5 사이에서 선택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작가는 여러 질문들을 건넸다.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평소에는 생각해본 적 없었던 질문들이다. 긴 머리와 짧은 머리 중 나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웨딩피치와 그랑죠, 나에게 더 익숙한 것은?
"음, 짧은 머리를 해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계속 긴 머리였어요. 한번 시원하게 잘라보고 싶어요. 긴 머리이긴 하지만 짧은 머리에 대한 생각을 늘 하고 있으니까… 3 정도로 할까요?"
"그랑죠는 사실 내용을 몰라요. 웨딩피치는 정말 좋아했어요! 5 할게요."
그렇게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연스럽게 짚어오며 '젠더'에 관한 생각들을 풀어낸다. 낯선 누군가와 이렇게 마주 않아서 특정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경험이 또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질문에 모두 답을 하고 나자, 작가가 나의 이야기로 향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향으로 전환하는 작업은 정말 흥미로웠다. 내가 선택한 단어는 그 개념을 상징하는 재료가 되고, 숫자는 재료의 양이 된다. 조향사의 의도를 담아 조향을 하는 일반적인 향과 달리, 나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향을 만들기 때문에 어떤 향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재미있는 지점이었다.
한 방울씩 똑, 똑, 떨어뜨려 만든 향이 완성되었다. 향을 맡아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독특한 향이 났다. 나의 이야기가 그대로 향이 되었다고 하니 정말로 '나다운' 향이라는 생각이 들어 특별하게 느껴졌다. 작가는 향에 이름을 붙여달라고 했고, 나는 '오래된 카페트'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향을 맡는 순간 어둑한 방 안에서 햇살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곽파 작가는 그렇게 3일을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젠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편안하게 꺼내고, 그 이야기를 향으로 만들었다. 그 중 같은 향도, 같은 이름도 없다는 것이 신비로웠다. '이 세상에는 N가지 향이 있다'는 프로그램의 이름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2년 주기로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작업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젠더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걸 느낀다고.
실제로 이 작업 중 만드는 향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기에, 일반적으로 '여성 향수', '남성 향수'로 분류되는 방식을 따르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니까, 향에는 경계가 없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오래된 카페트'와 같은 향을 맡고 있자니, 우리가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지어 생각하던 것의 경계 또한 흐려질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을 해본다.
작가는 향기가 숙성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린다며, 방 한 켠에 놓아두고 오가다가 한 번씩 향을 통해 이 순간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기억이 흐려질 때쯤 한 방울 톡 떨어뜨려 냄새를 맡으며 삼일로창고극장 스튜디오의 풍경을 떠올려 본다. 기억과 향기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어떤 향을 맡으면 순식간에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 향에도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작가와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 깃든 것 같다. 대화의 내용은 어느새 가물가물해져 세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나눈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고 향기로 남게 됐다. 2년 뒤 내가 또 이 작업에 참여한다면, 그때는 어떤 향기로 기록이 될까?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