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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 Feb 05. 2023

풍요하리의 바느질 도감 - 9

완두콩깍지를 닮은 펠트 [반려연필캡]

‘연필’이라는 존재는 늘 향수를 안겨준다.

초등학생시절 커다랗고 네모난 플라스틱 필통에 찔릴 듯이 뾰족한 연필을 하나하나 깎아서 넣어 다녔다. 여러 개의 연필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연필과  쓰지 않는 연필이 있고,  쓰는 연필은 가장 먼저 짜리 몽땅해진다. 스르르륵 스르르륵 연필깎이의 손잡이를 돌려서 연필을 깎으면 괜히 마음이 정화되는  같다. 뾰족한 연필을   있다는 설렘과 빨리 깎아서  연필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 괜스레 양심에 찔리기도 했. 나의 초등학생 시절에는 월드컵 용사들이 캐릭터로 새겨진 연필이 유행했다. 햄버거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특정 햄버거 세트를 사면 사은품으로 주었던  연필을 얻기 위해 햄버거를 열심히 먹었다. 그때 나의 원픽은 이천수 선수였는데 단순히 외모가 멋있어서 좋았다. 찢어진 눈매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내가 축구에 대한 유일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2002 월드컵 연필이다. 이러한 좋은 추억들을 남겼지만, 연필은 내게  사용되지 않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연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연필은 다시 내게 소중한 필기구가 되었다. 이는 취미로 필사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사각사각한 필기감이 주는 편안함과 지우개로 지울  있다는 점은 ‘틀려도 괜찮아, 다시 쓰면 되지.라고 누군가가 말해주는  같았다. 취미에서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내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종이와 연필의 조합은 필사 시간을 더욱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듯 연필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낄 무렵, 언니는 연필캡이라는 작은 소품을 다시금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 자매는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만큼 언니연필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2019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연필은 더욱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림 초보자여서 스케치를 반드시 해야 하는 내게 연필은  도움이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지우면 되고, 오래 손에 쥐고 있어도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직장인이었던 당시에는 필통을 사용하지 않았고 가방에 연필을 그냥 들고 다니면 심이 부러지거나 가방 안감에 자국이 남기도 했다. 이때 언니가 만들어준  연필캡이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되었는지 모른다.


 연필캡을 보면 완두콩이 생각난다.  익은 완두콩깍지를 연필에 씌워놓은  같은 모습, 빙그레 웃는 미소가 연필 수호자의 온화한 미소처럼 느껴진다. 언니 하리가  연필캡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알고 있다.  덕에 연필캡의 처녀작들이 많이 남아 있다. 단순 완두콩 모양이 아닌, 레이스가 둘러진 모양도 있고 아이보리색, 핑크색  다양한 색상들도 있다. , 연필캡만 달랑 있으면 심심해 보였는지 골드 색상의 체인을 직접 잘라서 반짝이는 비즈들과 함께 달아주었다. 이는 어렸을  문구점에서 골랐던 샤프가 생각이 난다. 샤프  근처에 달랑거리는 예쁜 비즈나 캐릭터 참이 달려 있었다.  향수를 그대로 느낄  있도록 캡마다 비즈가 달려 있다.


언니가 만든  완두콩 연필캡이 나에게 특별한 존재로 된 에피소드가 있다. 때는 2019 언니에게  연필캡을 하나 겨우 얻어서 내가 자주 쓰던 지우개가 달린 노란색 연필에 꽂고 사용하고 있었다. 연필캡도 연필도 소중했던 나는 연필에 이름표를 붙여두기까지 했다. 한참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하던  갑자기  연필과 연필캡이 사라져 버렸다. 당시 여러 지점을 이동하며 일을 했던 터라 어디에서 잃어버린 것인지 조차 예상할  없어서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끼던 연필캡이 사라지니 마음이 휑한 느낌이었다. 하필  연필캡은 표정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붙어 다니던 친구를 잃어버린  같아서 상실감마저 조금 느끼기도 했던  같다.

그리고  달의 시간이 지났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다른 지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연필캡이 생각이 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멀리 유리장 안에서 노란색의 어떤 물체가 보였다. 숨을  참으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연필꽂이에  연필과 연필캡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유리장의 주인은 ‘취미미술동아리였다. 아마 자신의 동아리원 중에 하나가 두고 갔으리라 생각해서 보관해 두신  같았다. 순간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의 연필캡은 꼬질꼬질하게 때가 탔지만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로는  친구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벌써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곁을 지키고 있다. 언니가 만들어준 소중한 펠트 연필캡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 신기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저 여행을 다녀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있었을 때보다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겠구나 싶어서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하다. 이러한 사연이 생긴 이후로 내게 연필캡은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작년에는 언니가 만들어둔 샘플을 연구해 다시 생산했고 플리마켓에서 열심히 팔기도 했다.  연필캡을 데려가시는 분들에게도 나처럼 즐거운 에피소드가 하나씩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니 하리는  연필캡과 연필 세트를 [반려연필]이라고 불렀다. 작고 보잘것없는 연필 하나에도 여러 이야기가 스며드는 풍요하리 공방. 반려연필을 데려가신 모든 분들에게 행복한 일상이 지속되기를 정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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