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을 허용하는 허술함'에서 제주 가치를 쌓다

그냥 제주 살아요 : 故 호암 양창보 화백-양건 건축가

by 고미


사람을 만나는 일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설렌다. ‘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는 흔들림은 잠시, 삼투압 현상처럼 빈틈으로 스며드는 새로운 영감이나 지혜, 철학 같은 것이 주는 희열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양건 건축가와의 만남도 그랬다. 언론사 문화부에 오래 몸담았던 덕에 아버지이신 故 호암 양창보 화백을 먼저 만났고, 두 사람의 사이를 나중에 건너 들었다. 좋게 얘기하면 토막토막 잘 쌓았지만 연결고리가 허술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상태였다고나 할까. 어쩌면 그래서 이전의 기억과 오늘 들은 얘기가 어우러지며 이어진다.

몇 번인가 마른침을 넘기면서 ‘잘 알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습관처럼 남아있는 자료를 뒤적이고, 기록은 있는지 하는 편협한 접근에 머물렀음도 반성한다. 사람을 통해 배우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깨우침을 얻었다.


‘기억하는 손’은 사실 기억하는 일의 의미를 확장하기 위해 기획했다. 우연히 조금은 고지식하고 요즘 기준으로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작업이지만 손을 통해 기억하고 이어가는 작업이 전통과 문화 외에도 공동체와 생물다양성까지 ‘삶’이라고 하는 지탱한다는 메시지를 공유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화가인 아버지와 건축가인 아들의 ‘손’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놓고 꽤 오래 고민했다.

왜 굳이 ‘손’으로 한정하는가. 그랬더니 답이 나왔다.


제주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지키는 일


“언젠가 아버님 작품을 보면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하늘에 색을 칠하지 않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아들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기는 했죠. 제주 밖에서 생활하다 보니 아버님 작품 속 제주가 조금은 좁게 느껴졌거든요. 끝내 색을 버리지는 못하셨어요.”

지난 2023년 펴낸 건축 에세이 「차원감각」에서 양건 건축가는 체험과 공유를 강조했다. 그러한 생각의 시작은 바로 ‘지역성’. 아버지 고 양창보 화백이 오랜 습작 기간을 바탕으로 ‘제주 한국화’의 장을 연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제주적인’에 천착했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기질과 삶, 철학이 아우러지며 자연스레 몸에 배어 가는 것들을 살피게 됐다.

고 호암 양창보 화백(1937~2007)은 ‘제주 화단의 큰 산’으로 기억된다.

제주의 체계적인 미술 교육은 1973년 제주대학교가 미술교육과를 만들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호암 선생은 미술교육과 교수로 재직한 30여 년간 제자를 양성했다. 미술 교육가였지만 화가의 삶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스물두 번 개인전을 통해 올곧게 사의(寫意‧사물의 형태보다는 그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하여 그리는 일)에 바탕을 둔 관념산수화를 그렸다. 사실적 풍경을 그린 듯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의 모습을 함께 담은 화풍은 제주를 만나며 독보적인 창작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랜 습작 기간에 터득한 수묵의 조화와 선묘의 완급 조절로 제주 한국화라는 새 영역을 개척했다.

그런 아버지의 그림에 토를 달았다. 같은 화가의 길을 걷는 것도 아닌 아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몇 번인가 시도했지만, 끝내 자신의 화풍을 지켰다. 양 건축가의 기억은 그랬다.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양 건축가는 ‘다르게 봤던’ 경험을 말했다. 양 건축가는 대학 진학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1998년 제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익숙해서 그런가 싶었지만, 아버지 작품 속 제주에는 ‘지경(地境‧나라나 지역 따위의 구간을 가르는 경계)’이 있었다. “더 넓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러니 뭔가 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생각을 말했던 거죠.” 하지만 아버지의 작품은 늘 꽉 채워져 있었다.


아버지의 유산과 ‘차원감각’


‘차원감각’의 개념은 거기서 출발했다. 그가 “한 사람이 체험한 환경에서 형성된 개인적 감각이면서, 동시대적 정체성으로 공유되는 집합적인 인지체계”로 풀이하는 ‘차원감각’은 얼핏 딱딱하게 들리지만, 실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양 건축가는 제주에 돌아왔을 때 책무처럼 주어진 ‘지역성 건축’에 자신의 경험을 투영했다. 그러고는 어떻게 제주의 지역적 특성을 건축에 반영할 것인가에만 집중하던 생각을 2000년대 중반에 바꿨다. 제주의 주거 문화를 주제로 논문까지 썼지만, 지역성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예부터 전해 온 제주의 건축물에 담긴 정신을 무시하지 않고, 현재, 더 나아가 미래로 계승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옛 것’과 ‘현재의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오래되고 또 오래 갈 풍경 안에 건축물이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호암 선생과 마찬가지로 제주 건축가로서 역할보다는 건축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역할에 무게를 둔 것도 영향을 미쳤다. 호암 선생이 제주 풍경을 실제와 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투영해 자신의 방식으로 옮긴 것처럼 ‘제주 사람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건축을 풀어 가기로 했다.

아버지의 지경이 제주 안에서 오래 품고 바라보며 ‘지키고 싶은 것’을 향하고 있다면, 아들의 지경은 제주 안과 밖의 흐름을 살피며 ‘더불어 사는 것’에 맞춰져 있다.


가치를 더하는 일에 대한 고민


그래서 그는 ‘제주 공동체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고 있다.

제주의 정주 공간이자 서사적 풍경과 문화예술의 가치를 함축한 건축, 도시 재생 같은 현실적이고 민감한 주제를 피하지 않는다.

양 건축가는 최근 호암 선생의 작품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화가이지만 지역 미술 교육가이자 문화 예술계의 역할에 조명이 집중되면서 정작 작품에 대한 평가는 더딘 데 대한 아쉬움에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영상 아홉 편을 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제주특별자치도청과 제주특별차지도의회, 제주시청 등 행정기관에 보관된 작품들의 상태를 눈여겨보게 됐다. 제주현대미술관 공공 수장고와 제주시청 기록관에 보관된 작품들이 제대로 빛을 보게 하는 방법도 고민 중이다.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은 종종 같은 길을 가는 것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지만, 이 두 사람은 비슷하지만 다른 길을 걷는다. 이유는 생각보다 현실적이었다.

양 건축가는 “고등학교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미술학과로 진학을 하겠다는 각오를 전한 다음날 아버지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양 건축가는 “작업실로 불러서 가봤더니 재떨이가 넘치도록 담배 꽁초가 쌓여있었어요. 밤새 한 숨도 안자고 고민을 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제주도 미술 교육의 한 획을 긋고 나름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로, 또 가장으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고. 그래도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서울대에 진학해라 하시더라고요. 그 정도 실력은 안된다고 생각해서 건축학과에 원서를 넣었습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 때의 결정이 아쉽지는 않는가 물었다. 양 건축가는“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은 아쉽지 않은데 당시도 그렇고 그 이후로 아버지의 작품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다.


허술함을 사랑하는 이유


언젠가 그가 “제주 건축물에 담긴 허술함을 사랑한다”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양 건축가는 “살아가는 데 완벽한 것은 없어요. 옛날 제주 집은 이웃끼리 품앗이로 짓거나 돌을 쌓는 기술자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었습니다. 당장의 필요에 집중한 그 과정은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허술해 보일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삶이라는 본질이 있어요. 건축에서 잊으면 안 되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양 건축가의 말이 호암 선생의 작품 속 풍경과 포개진다.

쉽지 않은 과정이다. “다음은 누가 할까요?” 하는 어리석은 질문에 바로 답이 돌아온다.

“딸 셋 중 두 명이 각각 건축과 미술을 공부하고 있어요. 어깨너머 같은 방향에서 본 것들을 펼칠 거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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