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 때문, 때문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입사 12년 만에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한국인 사원 하나 없는 외로운 회사이기는 해도,
일본에서 이름만 대면 모두가 ‘그 딱딱한 회사?’라고 할 만큼 보수적인 직장이긴 해도—
나름의 목표를 품고, 즐거움을 찾으며 일해 왔는데.
회사원의 일이라는 건, 왜 늘 한꺼번에 몰려오는 걸까.
담당하던 사업이 커지면서 업무가 막 늘어나던 그때, 마침 제품 품질 문제가 터져서 긴급 대응이 이어졌고, 하필 회사의 조직개편까지 겹쳐서 인원 충원에도 시간이 걸렸다.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는 손수건 마술처럼, 줄어들 기미가 없는 업무들이 산처럼 쌓여 갔다.
점심 식사는커녕 하루에 화장실 한 번 가기도 어려운 날들이 이어졌다. 몸은 만성피로에, 식욕부진에, 과민성대장증후군에... 난생처음으로 '이러다 정말 일에 치여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같은 부서 사람들은 내 상황을 듣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곧바로 업무 분장을 다시 편성하고, 과부하된 업무부터 조금씩 덜어 내기로 했다.
‘아, 좀 살겠다.’
업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지 딱 한 달째 되던 날. 막 트이려던 숨통을 단번에 조여 오는 한 마디가 떨어졌다.
"암입니다."
암 선고를 받은 그 순간부터, 내 안에는 이상한 증상이 하나 생겼다.
확인할 수도 없는
장담할 수도 없는
그놈의 ‘원인’을 찾아내려는 집착증.
-그때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나?
-요 몇 년 회식 자리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바빠서 빵이며 기름진 음식만 잔뜩 먹어서인가?
-신입 연수 때 1년 동안 화학공장에 출근했던 게 몸에 남아 있었던 걸까?
-육아가 시작되고 몇 년째 깊이 자지 못한 게 문제였나?
-아니면… 코로나 백신?
혹시 와이파이… 블루투스 때문에?
끝없이 찾았다.
별문제 없이 잘 살고 있던 나에게 불현듯 암이 찾아온 원인을.
하필이면 눈꺼풀에 이상한 덩어리가 자라서, 멀쩡하던 한쪽 눈을 통째로 잃어야 했던 이유를.
여느 때와 같이 자기 전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적는다. 오늘 느낀 슬픔, 외로움, 그리고 내가 애써 피하는 것들...
수술이 끝난 지 반년.
일기장에는 내 멋대로 단정지은 '원인'이라는 녀석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아이라이너, 아이크림, 안약,
플라스틱 용기, 화학 제품,
술, 기름진 고기,
소금, 첨가물이 많은 조미료,
꽃가루, 미세먼지,
햇빛...
참 바보 같다.
하루 종일 이것 때문이야… 저것 때문이야…
그래서?
이것들이 내가 수만 분의 1도 안 되는 희귀 암, 눈꺼풀암에 걸린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기나 할까.
그렇다면 앞으로 뭘 조심할 수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모든 것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불안증이
나를 더 죽일 수도 있겠다고.
사실, 알고 있었다.
내가 하고 있던 것은 원인 찾기가 아니다.
앞으로 조심하면서 건강하게 살기 위한 방법을 찾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이 상황이 싫어서,
지금의 모습이 싫어서—
모든 것을 무언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원망하고 싶었다.
"선배, 많이 기다렸죠? 항상 가던 곳으로 가요."
평소에 자주 가던 회사 앞 이탈리안 레스토랑. 가게는 특별히 달라진 게 없는데,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다. 두 눈으로 보던 것들을 하나의 눈으로 바라봐서 그런가.
"몸은 좀 어때요, 선배?"
"응, 이렇게 후크선장 같은 모습으로 다녀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회복하고 있어."
"다행이에요. 저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정말 걱정 많이 하고 있어요. "
"갑자기 쉬면서 업무까지 다 내려놓고 나와서, 내가 오히려 사람들한테 미안하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때… 선배가 일이 바빠서 힘들어했었잖아요. 병의 원인이라는 건 모르는 거지만, 그 시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좀 그래요. 더 빨리 알아차려서 같이 해결했으면 훨씬 나았을까... 그때의 스트레스가 몸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
"말만으로도 고마워.
맞아. 나도 한동안은 원인을 찾으려고 애썼어. 그때 일을 너무 많이 했나 싶기도 했고.
근데… 암에 명확한 원인이라는 건 없더라. 같은 환경에 있어도, 비슷한 생활을 해도, 모두가 같은 병에 걸리는 건 아니니까."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어쩌면… 더 빨리 병들어 죽을 수도 있었던 몸이, 바쁘고 부지런히 지내서 이 정도로 살아남은 걸지도 몰라. 지금도 그렇게 바쁘기만 했던 회사에서 다들 기다려 준다고 하니까, 그게 또 버티는 힘이 되는 거고. "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원인도 치료약도 확실한 게 하나도 없다면,
내 마음대로 믿기로.
네 깟 것들은 원인이 아니야.
그 이상한 덩어리는 그저 어쩌다 생겨난 것뿐이고, 있는 힘껏 도려냈으니—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