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나면
걷게 되는 여행의 나날

미야케 쇼 <여행과 나날>

by 이초케

이 영화는 내게 여행이 시작되는 ‘시점’에 관한 영화였다. 엔딩 장면에서 불규칙하고 불안정한 걸음으로 눈길을 빠져나가는 주인공을 보며, 극 중에서의 여행은 끝났지만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깨달은 주인공이 진정한 삶의 여로를 떠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jXwK27PNIHp5v-URjp1an3x-EzMyMnQqHDj1c_PxSccWMF9iWLLlcGDWFitVTqZC1E06s8WQFRSX3nRfBA_EW6XxBru8kXI6QcMTXOlAVbGSZ4am6uWE4-jdasC_piceJHoKnsh8LwtS_MpBLjn59g 복사본.jpg


영화 속 엔딩은 두 번 나온다. 위에서 언급한 엔딩이 있겠고, 각본가인 주인공이 쓴 시나리오가 극 중 이야기로 등장하는데 그 영화의 엔딩이 등장한다. 해당 이야기가 끝나면 주인공인 각본가 ‘이’(심은경)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가 참여한 영화의 GV 장면이 나오는데 각본에 관련된 관객의 질문에 ‘이’는 자신이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솔직하고 용기 있는 고백을 내뱉은 시점부터 주인공의 여행은 이미 시작 됐는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 말을 한 뒤, 주인공은 여행을 떠나게 되고 사고나 행동이 좀 더 유연해지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엔딩과 마찬가지로 두 번 나온다. 어떤 계기를 통해 각본에 대한 생각이 전환되는 시점에 놓인 주인공이 새로운 각본을 시작하는 이야기, 그리고 여행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얻은 주인공이 삶의 진정한 여행기를 새로이 시작하는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시작이 맞물리며 일어나는 아기자기한 해프닝들이 어딘지 모를 위로와 용기를 건네주는 영화였다.


스크린샷 2026-01-29 오후 4.34.49.png 여관 주인과 주인공이 여관 주인 전처의 집에서 황금잉어를 훔치는 장면.


극 중에서 여관에 찾아온 경찰은 ‘이’에게 여행인데 미술관이나 온천에 가봤냐고 묻는다. 여행은 응당 그런 것이니까 이 질문은 그렇게 특별하지도 유별나지도 않은 질문이다. 그렇지만 ‘이’의 말, 그냥 강물을 바라보았다던가 동네를 돌아다녔다던가 했다는 그녀의 대답을 들으면 여행의 전형적인 형식과 틀에 대한 잔잔한 물음들이 생긴다. 여행이란 무언가 비어있는 마음을 가득 채우거나 가득 차있는 공간을 가는 것이 아닌, 덜어내거나 비어있는 공간에 무언가 채울 필요 없이 존재하는 삶의 방식 그 자체일 수 있다. 삶이 여행이라면 좀 더 와닿는 생각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영화에서 ‘이’는 말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말은 어떤 의미에서든 이미 규정하고 있는 이미지와 정의들이 담기기 때문에 비속어나 비난의 말이 아니더라도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말을 덜어내고 여백의 이미지로 시간을 채우는 장면이 많다. 여행은 어쩌면 나를 옥죄는 말들로부터, 어떠한 잡음들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에게 여백을 선물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스크린샷 2026-01-29 오후 4.34.04.png 영화는 여백이 되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말에서 해방되어 여백을 만들어 주는 여유가 아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