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금고 월간 매거진의 <인문학 식탁> 코너에
칼럼을 정기 연재하고 있습니다.
음식 속에 문학을 녹여내어 맛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하고 깊은 의미까지 담고자 합니다.
3월호 음식 주제는 '솥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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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금고 월간지 MG magazine.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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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 · 가을 편)’에는 이중 돌솥에 호두밥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료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쌀과 호두가 주재료이며 간은 그저 맛술과 간장으로만 낸다. 이렇게 솥으로 지은 호두밥으로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를 만든다. 다음날 주인공은 초여름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초록색 풑밭에 앉아 이 호두밥 오니기리를 한 입 크게 배어 문다. 화면 밖의 나까지 호두밥의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 쫀득하면서 찰기 있는 식감이 느껴진다. 상쾌한 초여름 공기 속에서 솥으로 지어낸 밥알은 반짝반짝 윤이 난다.
영화에서 각박한 도시 생활에 지친 주인공은 자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곳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만으로 정직하게 요리를 한다. 시간과 품이 만만치 않게 들지만 조급해하지 않는다. 마치 자연에 순응하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요리를 해나간다. 그러면 자연은 감히 그 어떤 것으로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맛으로 보답을 한다. 맛의 스펙트럼으로 표현하자면 마치 넓이는 그대로인데 엄청난 깊이가 우러난 느낌이랄까. 음식을 만드는 여러 도구 중에서도 솥은 바로 이런 자연과 똑 닮았다. 단순한 재료 몇 가지만 솥에 넣으면 그 맛에 무한한 깊이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맛을 품어주는 ‘솥밥’의 넉넉함
안 어울릴 것 같은 식재료들을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일등공신 역시 단연 솥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솥밥은 ‘토마토 올리브 솥밥’이다. 먼저 쌀, 토마토, 올리브를 깨끗이 씻어 준비한다. 솥 안에 이 개성 넘치는 음식들을 차곡차곡 넣은 후, 기도하는 마음으로 뚜껑을 조심스레 덮는다. 1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뜨거운 열기에 솥뚜껑이 들썩이며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낸다. 이 때 불의 강약만 몇 번 조절해주면 솥밥은 김을 모락모락 내며 웅장한 자태로 등장한다. 그 맛은 어떤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음식들이 알 수 없는 매커니즘에 의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다. 좀 전까지 보글보글 거품이 흘러 넘쳤던 저 솥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토마토와 올리브가 이렇게 솥을 거치면 싱그러운 지중해의 맛을 가득 품은 근사한 요리가 된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토마토를 하얀 쌀밥에 슥슥 비벼서 짭잘한 올리브와 먹으면 지구 반대편의 맛이 느껴진다. 서양식 요리에 자주 쓰이는 식재료가 우리의 전통 식도구인 솥에 들어갔다 나오니 깊이가 더해진 퓨전 요리로 탄생한 것이다. 저 단단한 솥 안에는 신비로운 자연의 이치가 담겨있는 것이 틀림없다.
쉬어가는 삶이 선사하는 ‘솥밥’의 맛
한국판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도 솥밥이 등장한다. 무엇을 먹어도 허기짐이 가시지 않는 각박한 삶에 지친 주인공 ‘혜원’은 어릴 때 살던 집으로 내려온다. 이제 막 도착한 깜깜한 밤, 혜원은 갑자기 허기를 느낀다. 제대로 된 식재료도 하나 없는 휑한 집에서 그녀가 선택한 저녁메뉴는 말갛게 끓인 된장배춧국과 솥밥이다. 차갑게 얼은 손을 녹여가며 쌓인 눈을 파헤쳐 배추를 구해온다. 된장국을 끓이는 동안 솥 안에서는 보글보글 거품이 넘쳐나며 밥이 지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윤기 나는 쌀밥을 마주한다. 숟가락 위에 밥을 동그랗게 올려 야무지게 입에 넣는다. 별 것 없는 단출한 식사였지만 갓 지은 따끈한 밥과 국의 온기가 전해졌던 걸까, 창백했던 혜원의 얼굴에 발그스레 생기가 퍼진다.
사실 솥밥 맛을 알아버리면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시간이나 상황 등 조건의 제약 때문에 솥밥을 못 먹는 것이지, 그 맛을 알고도 솥밥을 선택 안하긴 어렵다. 똑같은 하얀 쌀이더라도 솥을 거쳐 나오면 윤기, 식감, 맛 등 모든 면에서 그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무거운 솥을 사용하는 수고로움,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불조절이 동반되지만 그 고슬고슬하고 광택이 도는 쫀득한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솥밥 예찬론자가 되어 버린다. 아무리 갓 지은 밥맛을 자랑한다는 즉석밥의 편리함이 강세일지라도 솥밥의 영역은 여전히 고유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과연 숨이 차도록 빠르게 달려야하는 요즘 세상에서 즉석밥 대신 솥밥을 선택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는 단순히 밥의 취향 문제만은 아니다. 시대의 속도에 맞추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조급함을 버리는 것. 정말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즉석밥이냐 솥밥이냐의 문제는 조금 과장하자면 다급하게 덮쳐오는 삶의 물결을 잠시나마 단호하게 막아설 수 있는 용기로 연결된다.
한국판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이다. 잠깐의 쉼조차도 죄책감을 느끼는 요즘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처방전이 아닐까싶다. 숨 가쁜 도시에서의 삶에 지쳐 시골로 내려온 주인공 혜원은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 봐야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혜원처럼 과감히 떠날 용기는 없기에 나는 부엌에서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보기로 한다. 이리 저리 살펴보다 시선이 한 곳에 닿는다. 저거다. 저기 저 투박하고 무거운 솥 안에 나만의 작은 숲이 기다리고 있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품어주고 깊은 맛까지 더해주는 나만의 작은 쉼이다. / 푸드 칼럼니스트 이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