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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by 묵온



아름다운 것을 기억하고 싶다. 이제는 내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지 못하므로 다른 이들이 만든 것을 마음에 담겠다.

노래를 만들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악기를 잡고 컴퓨터를 다루는 물리적 작업보다 어떤 이야기를 할지, 어떤 구조로 곡을 맺을지, 어떤 순서로 곡들을 앨범에 배치할지 구상하는 데 오랜 시간을 썼다. 생각하는 동안 손은 놀아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오직 머리만 작품의 활로를 뚫으려 안달하나 창작을 위한 정신노동은 겉으로 보이지 않기에 생산성 수치에 잡히지 않는다. 만드는 일은 시간을 버린다는 비난을 무릅쓸 용기를 요한다.

음악가로 살기를 포기한 뒤로 여전한 것은 남아도는 시간을 무슨 활동으로든 채워야 했던 관성뿐이다. 요즈음에는 보통 프랑스어를 공부하거나 책을 읽고 가끔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다. 이따금 속에 묵직하게 얹히는 글귀나 선율을 만나지만 곱씹기보다는 금세 다음으로 넘어간다. 아무도 묻지 않는 저작물 감상 이력마저도 확장하지 않으면 손해라고 여기는 탓이다. 나와 특별히 이어진다고 느끼는 작품을 접하고자 한다면 많이 보는 쪽이 깊이 읽는 편보다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작품과 나를 잇는 끈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려워졌다. 새 인연을 만난 경험이 그토록 선명한데 왜 인연이라 믿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무력감이 아쉬웠다.

그 아쉬움을 줄이고자 다음 글들을 쓴다. 그저 여러 번 읽고 보고 들으며 기억해도 될 것을 굳이 글로 남긴다니 변변치 않은 것이라도 만들겠다는 욕망이 여태 수그러지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내가 무엇을 아름답게 바라보는지 나 자신이 이해하도록 정리하는 일이 필요했다. 아름답지 못한 광경이 쏟아지는 시기에 증오에 잡아먹히지 않고 사랑을 감각하도록.


2025.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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