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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자 Feb 22. 2022

태풍전야 같은 우울한 하루

문과생 생존기

회사에서 우울했다. 고질병인 목디스크가 재발했고 소화불량과 폭풍설사에 시달렸다. 동료 직원이 퇴사하면서 업무가 재분배되었다. 그럴 수 있다. 십수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러번 겪었던 일이다. 문제는 내가 받은 업무가 작년에 컨설팅을 받고 시작해서 체계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업무라서 쉽지 않았다. 전임자는 다른 업무로 바빠서 인수인계를 받을 시간이 없었다. 상사는 결과물을 도출해야 하는 입장에서 압박했다. 이해할 수 있다. 예전 경험을 바탕으로 이러저러한 불합리한 점을 수정하자고 제안했는데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상사는 회의에서 세부사항과 작년 문제를 지적했다. 전산도 구축 단계라서 메뉴얼이 없었고 담당자 말 한마디에 원상복구 후 재작업을 해야했다. 암울했다.

새벽 다섯시에 출근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뜬눈으로 밤을 샜다. 회의 전에 세부사항을 검토하려고 일찍 나섰다. 지하철 운행 전이라서 자차로 출근했다. 정문이 닫혀 있었다. 비번을 눌러도 열리지 않았다. 예전에 일했던 조선소는 24시간 열려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해서 당황했다. 새벽에 팀원에게 카톡을 보내는 결례를 범했다. 당연히 아무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전화해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차에서 우울하게 밀리의 서재에 접속했다. 경비원 아저씨가 출근하신 후에 들어갔다. 자료를 수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다행히 회의는 별 문제 없이 지나갔다. 탈진했다. 지난 십수년 동안 전문성을 가지고 간섭 없이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업무도 조직도 사람도 낯설었다. 지난 경험과 공부가 무의미해지는 것 같았다.

퇴근길에 오래 전에 봤던 테이크쉘터 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주인공은 정신질환을 앓는데 태풍이 다가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과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출을 받아서 뒷마당에 방공호를 만들었다. 불행히도 악몽 속의 태풍은 현실이 되었다. 태풍 같은 소동이 일어날 것 같았다. 사무실은 태풍전야처럼 조용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모니터를 바라보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언제든지 태풍은 순식간에 다가와서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이다. 다른 곳으로 대피할까. 그곳에 또다른 태풍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최소한 우울감이 이어지지 않도록 마음 속에 격벽 같은 칸막이를 세우고 싶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박의 갑판 아래에는 격벽들이 있고 그것들은 일종의 칸막이로서 침수를 방지하고 방화벽 역할을 한다. 가족과 내 자신을 물과 불로부터 지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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