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뉴스 오브 더 월드> 리뷰
남북전쟁 종전 5년 후, 참전용사인 '제퍼슨 카일 키드(톰 행크스)' 대위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계 각지에서 전해지는 뉴스들을 사람들에게 읽어주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닌다. 어느 날, 키드 대위는 키오와 부족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그들의 일원으로 자라난 10살 소녀 '조한나(헬레나 젱겔)'를 발견한다. 법에 따라 그녀를 친척들에게 데려다 주기로 결정한 그. 그는 그녀와 함께 뉴스에 등장한 다양한 사건들과 험난한 자연환경을 뚫고 텍사스의 넓은 평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뉴스 오브 더 월드>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무엇보다도 현장의 긴장감과 생동감을 날 것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시킬 줄 아는 핸드헬드 연출과 빠른 리듬감의 편집이다. 이는 그에게 <블러디 선데이>부터 '제이슨 본' 시리즈, <캡틴 필립스>나 <7월 22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뉴스 오브 더 월드>에서는 일부 추격전과 총격전 외에 그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장면은 많지 않다. 대신 그 자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품에 안은 채 서부를 가로지르는 주인공들을 향한 차분한 시선이 대신한다.
그 시선의 중심에는 제목대로 뉴스가 있다. 실제로 영화는 키드 대위가 사람들에게 뉴스를 읽어주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키드 대위의 여정이 시작되는 첫 장면과 여정이 끝나는 마지막 장면이 큰 대비를 이룬다는 점이다. 우선 뉴스를 읽는 장면의 조명이 다르다.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날에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서 읽어 내려가는 데 비해 끝에서 키드 대위는 밝은 대낮에 글을 읽어나간다. 또한 그가 뉴스를 전달하는 태도도 판이하게 다르다. 허리를 숙인 채 신문 만을 바라보며 건조하게 뉴스를 읽고 전달던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청중들과 소통하며 당당하게 뉴스를 읽어나간다.
심지어 뉴스의 내용도 다르다. 주로 전염병 발병과 같은 객관적인 사실들과 정보들을 전달하는 데 그쳤던 첫 번째 뉴스와 달리 마지막에 낭독하는 뉴스들은 사람들이 공감을 사기 쉬운 해프닝이다. 키드 대위의 뉴스 낭독이라는 동일한 상황을 묘사한 오프닝과 마무리는 그 안의 모든 내용이 다른 것이다. 이는 키드의 대사로부터 알 수 있는 뉴스의 의미, 곧 아침부터 저녁까지 땅을 일구며 일해야 했던 이들에게 고단한 일상을 잊기 위한 엔터테인먼트였던 뉴스가 키드의 여정이 끝난 후에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잃은 한 아이를 가족의 품 안에 되돌려주는 키드 대위와 조한나가 함께 하는 여정은 다른 한 편으로 키드 대위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읽어주었던 다양한 뉴스를 체감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키드 대위가 과거 남부군과 시비가 붙어 총격전을 펼치는 장면은 남북전쟁 이 끝난 직후인 1860년대 후반 남부에서 실시된 북부의 군정기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부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한 지주와 갈등을 빚는 대목도 흑인 노예제의 폐지로 인한 대규모 농장의 해체, 그로 인한 남부인들의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불만이 고조되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에게는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고, 그의 청중들에게는 오락거리이고 정보 전달에 불과했던 뉴스가 갖는 진짜 의미를 깨우쳐 나간다. 그는 남부 사람들에게 얼마 전까지 전쟁을 치렀던 북부의 탄광에서 사고를 당하고도 극적으로 살아남은 노동자의 이야기를 전달해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상황은 달라도 자신들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공감한다. 그들의 극적인 생환에 환호하고, 그들처럼 힘겨운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힘과 희망을 얻는다. 한 청년은 자신을 억압하던 주인을 죽이고 새 출발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키드 대위도 전쟁 중에 접한 아내의 죽음을 비로소 직접 마주하고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그는 뉴스 낭독을 위해 여러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대신, 본래 집으로 되돌아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뉴스를 읽는다. 그렇게 그는 고단한 일상을 잊게 해 주던 뉴스가 그 이상의 것임을, 그보다 더 중요한 힘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는 조한나가 있고 없음이 영화의 시작과 끝 장면의 또 다른, 그렇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인 이유다. 작중 조한나는 그 자체로 뉴스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나 정보 전달의 역할을 넘어서 공감을 통해 진정으로 서로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함축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미국 서부로 이주한 독일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 충돌로 인해 본래 부모님을 잃고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라난 조한나. 그녀는 미국 대륙횡단철도 공사 구역이 인디언 보호구역을 지나감에 따라 원주민들이 강제 이주당하거나 살육당하는 통에 양부모마저 잃고 키드 대위에 의해 백인 친척들에게 전해진다.
그런 그녀는 원주민 문화에 동화되었는데도 약간의 독일어를 기억하는 등 서로 다른 인종과 종족,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제각각의 이야기를 간직한다. 또한 그 이야기를 토대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던 키드 대위와 서로의 아픈 가정사를 공유하며,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렇기에 조한나를 구한 이가 나름대로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는 키드 대위인 것, 그녀가 가장 먼저 배운 영어 단어가 '이야기 Story'인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아무리 철도가 생기고 도로가 새롭게 놓아지더라도 사람들을 연결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서로를 이해하도록 만든 것은 결국 세계 각지에서 한 데 모인 이야기인 뉴스라는 사실을 곱씹어 보면 더욱 그렇다.
결국 <뉴스 오브 더 월드>는 각자의 가족을 잃은 이들이 새 가족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뉴스가 단지 문자로 적힌 정보가 아니라 분명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현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뉴스들이 쏟아지고, 심지어 그 뉴스가 담고 있는 진실, 사실, 허구, 거짓의 구분도 쉽지 않은 현재의 휘발적 뉴스 소비 세태에서 자칫 잊히기 쉬운 의미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가 미국에서 근대적 형태의 뉴스가 성립되어 가던 1870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도 뿌리로 되돌아가 진정한 뉴스가 무엇인지 고찰하고 문제의 답을 내놓는 키드 대위의 여정에 무게감을 더한다.
다만 <뉴스 오브 더 월드>가 의도한 메시지나 감정선이 명확히 전해지지 않다 보니 기존과는 다른 폴 그린그래스의 새로운 시도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여지가 있다. 영화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앞뒤 장면들의 연결점, 카메라의 움직임과 포커스를 통해 그림의 일부만 조금씩 보여주며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과 이해에 맡긴다. 예를 들어 조한나가 문득 독일어로 말하자 키드 대위는 무언가 기억나는 것이 있냐고 묻지만, 이내 그녀는 입을 다문다. 이때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추측과 상상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러한 불친절함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차분하고 잔잔한, 또 감성적인 드라마 장르를 많이 다루지 않았던 데서 기인한 한계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완성도가 완벽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9.11 테러를 소재로 한 <플라이트 93>, 피의 일요일로 대변되는 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 노르웨이 연쇄 테러 사건을 영상화 한 <7월 22일>과 같은 전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사회를 바라보는 폴 그린그래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은 몇 가지 단점과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뉴스 오브 더 월드>의 매력을 부정하기 어렵게 만든다.